'소주 대전', 증류식 소주가 여름 주류시장 흔든다
'오픈런'과 '품절 대란' 만들어낸 프리미엄 소주의 반란
(시사저널=조유빈 기자)
국내 주류시장이 꿈틀대고 있다. '서민의 술'로 불리며 소주 시장을 양분했던 참이슬과 처음처럼을 밀어내고 새로운 루키들이 대거 포진했다. 원소주, 독도소주, 토끼소주 등 이름도 심상치 않은 이 소주들은 일명 '프리미엄 소주'라 불리는 증류식 소주다. 2020년에는 수제 맥주, 2021년에는 와인 시장의 성장이 괄목할 만했다면, 올해는 증류식 소주 시장에 주목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주류시장이 위축되는 와중에도 증류식 소주 시장은 커졌다. 고급스럽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비싼 술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다수에게는 사랑받지 못했던 증류식 소주가 시장의 샛별로 떠오른 이유는 뭘까. 대표적인 증류식 소주로 불리던 화요나 일품진로는 그려내지 못했던 '오픈런'이나 '품절 대란'을 만들어낸 프리미엄 소주들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증류식 소주가 떠오른 배경은
보통 증류식 소주는 쌀·보리 등 재료를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주는 희석식 소주다. 주정에 물을 타고 감미료를 넣어 맛을 낸다. 일반 소주와 제조 방식부터 다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그래서 그동안 증류식 소주는 '고급 술' '중요한 자리에서 마시는 술'로 인식돼왔고, 경제력이 있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소비됐기에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광주요그룹이 고급 한식에 어울리는 전통주의 필요성을 느껴 만든 술인 화요는 출시 후 10년 동안 적자를 겪었다. 2016년 야심 차게 등장했던 롯데칠성의 증류식 소주 '대장부'는 시장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단종되기도 했다. 그만큼 증류식 소주의 대중화는 어려웠다.
지금은 어떨까. 올해 초 국세청이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증류식 주류 출고량은 전년 대비 12.5% 증가했다. 2015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희석식 소주가 매년 감소세를 보이는 것과 대비된다. 화요가 열어젖힌 증류식 소주 시장은 중장년층을 넘어 2030 소비자들에게도 가까워졌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취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에 음주의 방점이 찍히면서다. 이 대세를 타고 새로운 증류식 소주들이 시장에 진출했다.
원스피리츠가 만든 원소주가 출시되자마자 연일 품절 사태를 불러일으키면서 증류식 소주에 대한 관심은 집중됐고, 이로 인해 이미 시장에 존재하던 증류식 소주들도 급부상했다. 미국 뉴욕 한인타운에서 인기를 끌다 한국에 상륙한 토끼소주는 최근 편의점 판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장부처럼 '가성비 증류소주'로 등장한 독도소주는 울릉도를 시작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루키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비싼 술'이 아닌 '힙한 술' 전략을 펼쳤다는 것. 이전의 증류식 소주들이 '고급 주류'의 특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 주류시장에서 떠오른 소주들은 MZ세대를 겨냥하기 위한 여러 요소를 갖추고 있다.
팝업스토어와 스토리로 부각시킨 존재감
팬덤, 한정판매, 프리미엄 소주. '박재범 소주'로 알려진 원소주는 이 세 가지 키워드로 힘을 줬다. 원소주는 6월6일까지 GS25와 함께 부산에서 팝업스토어 '지에스원'을 열었다. 오픈 첫날 새벽부터 오픈런 현상이 벌어졌고, 당일 준비된 수량 3000병이 모두 매진됐다. 지난 2월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서 운영한 팝업스토어에서도 2만 병의 원소주가 완판된 바 있다. 가수 박재범에 대한 팬덤과 한정판매하는 소주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해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대하고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팝업스토어의 특성도 원소주의 인기를 함께 견인했다는 평가다.
'힙한' 디자인과 제품을 둘러싼 스토리도 필수다. 원소주를 비롯한 증류식 소주들은 '소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녹색병'도 아니고, 비싼 가격을 과시하는 특별한 재질의 병도 아니다. 투명한 병에 고유의 라벨을 부착한 심플한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라벨에는 브랜드 스토리가 들어있다. 원소주의 '원'에는 하나(One)와 승리(Won)와 소망(Want)이란 키워드가 담겼다. 미국에 진출한 싱글 앨범 제목을 《소주》로 달고, 그동안 《백스피릿》 등의 콘텐츠에 출연하면서 소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해온 박재범이 술을 허투루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신뢰감도 인기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세를 타고 부각된 토끼소주에도 스토리가 있다.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어 '뉴욕 여행 인증 술'로 유명했던 이 소주는 미국인인 브랜 힐 대표가 만들었다. 2010년 말 한국에 들어와 여러 양조장을 여행한 그는 뉴욕으로 돌아간 뒤 한국 전통주에 대한 연구를 이어갔고, 2016년 토끼소주를 내놨다. 그가 한국에서 보낸 2011년은 '토끼의 해'. 그래서 술 이름은 토끼소주가 됐다. 희석식 소주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소주를 빚게 됐다는 미국인의 이야기는 한국인들에게 각인됐고,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는 한국 설화를 기반으로 '달과 함께 마신다면 혼자가 아니다'라고 라벨에 적은 문구는 혼술족에게 주효했다. 브랜 힐 대표는 2020년 충북 충주에 양조장을 차렸다.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토끼소주는 2만~3만원대의 비싼 가격에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적 가치 기반…콘텐츠 플랫폼도 소주 시장 진출
지금 뜨는 증류식 소주는 한국적 가치에 기반한다는 특징이 있다. 전통 소주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건곤감리 그래픽, 한국 설화, 역사적 인식 등이 제품에 스며있는 이유다. 가성비 증류주로 불리는 독도소주는 지난해 3·1절을 기념해 등장했다. 독도 우편번호인 40240을 브랜드화한 소주로, 역사적 가치를 하나의 화두로 삼는다. 국경일을 중심으로 마케팅에 나서기도 한다. 지난해 광복절을 기념해 광복절 에디션을 출시하고, 독도 후원 기업인 CU와 신세계백화점 일부 지점에서 판매한 바 있다. 이 술은 SNS를 타고 입소문이 났고, '독도'라는 이름이 주는 역사적 의미로 인해 일종의 가치소비 붐도 일었다. 독도소주는 4개월 만에 누적 판매 10만 병을 달성했다. 울릉도를 여행하는 관광객의 필수 아이템으로도 부상했다.
전통적이지만 올드하지 않고, 한국의 것이지만 힙하다. 한국적인 가치와 그를 좇는 유행, '고급'이라는 키워드가 만나면서 증류식 소주 시장이 가열되고 있는 셈이다. 선택지가 점차 늘어나면서 다양한 취향을 지닌 소비자들의 니즈(욕구)도 충족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한정판이다. 토끼소주는 올해 초 임인년을 맞이해 '호랑이해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이면서 한정판을 선호하는 MZ세대들을 공략했다. 토끼띠, 호랑이띠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음은 물론이다.
콘텐츠 속 아이템이 실제 증류식 소주로 출시된 사례도 있다. 중소기업의 현실을 녹여낸 왓챠의 대표 흥행 콘텐츠 《좋좋소》에서 소주 브랜딩 기획회의를 통해 등장한 '빡치주'와 '개빡치주'다. 극 중 조충범 주임이 야심 차게 제안했던 이 아이템을 사장은 가볍게 무시했지만, 왓챠는 화제가 됐던 술 이름을 놓치지 않고 지금 주류시장에서 가장 '핫한' 술인 증류식 소주로 출시했다. 《좋좋소》의 IP를 활용해 전통주 전문기업인 술샘 양조장과 함께 출시한 빡치주는 출시 2주 만에 1만 병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증류식 소주의 인기와 콘텐츠 파워를 함께 보여줬다.
온라인·편의점 등 다양한 판매 채널 통해 부흥
판매 채널도 다양해졌다. 온라인을 통해 픽업 예약이 가능하거나 배송받을 수 있다는 점도 시장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하면 판매로 이어지기 쉬운 온라인 판매의 장점을 겨냥해 증류식 소주 시장에 뛰어드는 업체도 늘어났다. 전통주로 분류되는 증류식 소주들은 온라인 판매가 가능하다. 원소주는 자사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판매를 진행했는데, 판매기간 동안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빡치주와 더빡치주는 스마트 오더 주류 픽업 서비스인 데일리샷을 통해 주문한 뒤 픽업할 수 있다. 추후 온라인 배송도 시작할 계획이다. 다양한 판매 채널을 통해 접근성이 높아진 프리미엄 소주에 대한 평은 SNS를 통해 공유되면서 또 하나의 유행을 선도한다.
편의점은 부흥하고 있는 프리미엄 소주 시장을 이끌고 있는 플랫폼이다.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라이프 플랫폼으로 떠오른 편의점은 근거리 스토어가 많아 소비자 접근성이 좋다. 농림축산식품부의 '2021년 주류시장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19~59세 성인 남녀 중 월 1회 이상 주류 소비자 2000명을 대상으로 선호 소비 트렌드를 조사한 결과 '편의점 구입'이 67.4%를 기록할 정도로 편의점은 대표적인 주류 구매 플랫폼이 됐다. 증류식 소주 판매량도 상승세다. 지난 5월을 기준으로 이마트24에서는 전년 동기 대비 판매량이 132% 증가했고, 세븐일레븐은 100%, CU는 71.8%, GS25는 38%의 판매 신장률을 기록했다.
편의점들은 주력 상품을 기반으로 프리미엄 소주 시장 경쟁을 이어간다. 원소주의 편의점 보급형 버전인 원소주 스피릿의 단독 판매권을 따낸 GS25는 7월부터 판매를 시작한다. 독도소주는 CU에서 단독으로 판매되고 있다. 이마트24는 일품진로와 이강주29를 포함해 증류식 소주 라인업을 늘렸고, 세븐일레븐은 시장에서 떠오른 토끼소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7월에는 가수 임창정과 조은술세종이 협업해 내놓은 증류식 소주 '소주 한잔'이 출시될 예정이다.
왜 화요는 온라인에서 팔지 못할까
원소주 등장으로 다시 막 오른 '전통주 논란'
원스피리츠의 원소주는 전통주다. 국순당이 만드는 백세주는 전통주가 아니다. 비전레드의 애플사이더인 '댄싱사이더'는 전통주다. 와인이나 위스키가 전통주일 수도 있다. 막걸리는 전통주인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서울장수막걸리는 전통주가 아니다. 애매하고 혼란스럽다. 우리의 상식 속 전통주와 현행법 속 전통주가 다른 이유는 뭘까. 최근 원소주를 비롯한 증류식 소주가 인기를 끌면서, 전통주 분류 기준에 대한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소비자가 생각하는 전통주의 개념을 관련 법이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단순히 개념 정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유통 경로와 세금이 걸려있다. 2017년 정부는 전통주 보호와 육성 차원에서 전통주의 온라인 판매를 허용했다. 주세도 50% 감면받을 수 있다.
사실 전통주 분류 기준에 대한 지적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현행법상 전통주의 기준은 뭘까.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전통주산업법)과 주세법에 따르면 전통주는 '민속주'이거나 '지역특산주'여야 한다.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이거나, 식품명인이 만든 술이거나, 지역 농민이 그 지역의 농산물로 만든 술이어야 전통주로 인정된다. 반대로 말해 해당 요건을 채우지 못하면 전통주가 아니라는 얘기다. 원소주는 농업회사법인인 원스피리츠가 강원도 원주의 양조장에서 원주 쌀을 사용해 만든 술이기 때문에 전통주다. 7월에 출시될 임창정의 소주 한잔은 충북 청주의 전통주 양조업체 조은술세종과 협업해 국산 쌀로 빚기 때문에 전통주다.
화요, 백세주, 장수생막걸리 등은 전통주로 인정받지 못한다. 화요를 만드는 광주요는 농업법인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주 요건을 통과하지 못한다. 백걸리는 전통 제조방식으로 만들어지지만 백걸리를 생산하는 더본코리아도 농업법인이 아니기 때문에 백걸리는 전통주가 될 수 없다. 장수생막걸리는 지역 농업법인이 생산하지만 유통 물량을 충당하기 위해 원재료에 수입산 쌀이 들어가고, 국순당의 백세주는 국산 쌀을 사용하지만 원재료 일부가 수입산이기 때문에 탈락이다. 반대로 와인과 위스키가 전통주인 경우도 있다. 지역 농민이 지역 재료를 활용해 만들면 전통주의 요건에 해당하기 때문. 전북 무주에서 재배되는 머루로 만든 와인, 경북 문경에서 재배되는 사과로 만든 위스키는 전통주로 분류된다. 토끼소주는 미국인이 외국에서 처음 개발했지만, 2020년 충북 충주에 농업법인을 설립하고 충주 지역의 원재료로 만들기 때문에 전통주다.
이렇게 모호한 기준 때문에 전통주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통주 개념이 협소해 우리 술 복원사업을 전개하거나 전통주를 계승하는 회사 제품들이 전통주로 분류되지 못하고, 다른 주종들만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에서 거론되는 방안은 민속주와 지역특산주의 구분이다. 와인, 맥주, 위스키 등 지역 농민이 지역 재료를 이용해 만든 술은 전통주가 아닌 '지역특산주'로 관리하고, 막걸리 등 전통주로 인식되는 술은 '전통주'로 구분해 관리하자는 것이다.
6월15일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개최한 '2022년 전통주 산업발전 포럼'에서는 예로부터 전승돼 오는 원리를 계승·발전시키는 술을 전통주에 추가하는 방안, 지역특산주를 전통주로부터 별도로 독립시키는 방안, 대형 업체가 생산하는 막걸리를 전통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 등이 거론됐다. 산업 진흥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전통주에 대한 개념 정리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농림부는 총 5회에 걸친 포럼을 통해 전통주 산업발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관련 법 개정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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