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미제 위험 수위] 오래된 사건 더 묵히는 법원..수치 역대 최악
서울중앙지법, 지난해 기점 심각 수준
미제분포지수 작년 4월 이후 1년간 마이너스
법조계 "복합적인 원인 탓..최근3,4년 새 심각"
[헤럴드경제=유동현 기자] 소송을 내더라도 수년째 1심 결론이 나지 않는 미제 사건이 역대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다. 법원의 사건처리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 것으로, 특히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민사소송 미제가 쌓이면서 당사자들의 불만은 물론 법원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양향자 의원이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 합의부 1심 미제분포지수는 지난해 4월 –1.8을 기록했다. 이 지표가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전환된 것은 처음이다.
미제분포지수는 미제사건 현황을 나타내는 수치다. 장기 미제사건이 적체될수록 지수가 낮아진다. 특히 2년을 초과한 사건들이 쌓일수록 급격히 하락하는 구조다. 2020년 1월 14.2였던 수치는 올 3월 -10.8로 최근 2년 사이 급격히 하락했다.
마이너스대로 떨어진 지표는 지난 3월까지 한 번도 플러스 구간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급기야 3월(-10.8)은 역대 최악 수준을 기록했다. 적체 현상은 수년전부터 나타나고 있었지만 불과 1,2년 전만 하더라도 지표는 플러스 구간에 머물렀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나타난 역전 현상은 최근 장기미제사건이 크게 늘었다는 의미다.
다만 3월에 수치가 급격히 떨어진 것은 민사 합의부가 맡는 사건의 기준이 소송 가액 2억원에서 5억원으로 상향 조정되면서 배당 사건 수가 줄어든 데 따른 것으로, 실제 수치가 한달 새 나빠진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전국 법원으로 확대해 봐도 마찬가지다. 전국 법원 1심 민사 합의부 미제분포지수는 2015년 34에서 2016년 41.2로 잠시 개선됐지만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2017년(40) ▷2018년(36.4) ▷2019년(34.8) ▷2020년(23.3) ▷2021년(13.4)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전국 민사본안 1심 미제사건은 지난달 기준 37만 6540건이다. 이 중 ‘5개월 이내’ 사건은 59%(22만 2745건), ‘1년 이내’가 26%(9만8125건)를 차지한다. ‘2년 이내’는 11%(4만1347건), ‘2년~5년’은 3.6%(1만 3833건), 5년이 초과된 사건은 490건이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주요 사건이 몰리는 만큼 쟁점이 복잡한 경우가 많아 상대적으로 불리한 점은 있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마이너스 지표를 두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며 사법 서비스 지연 우려를 나타낸다. 한 부장판사는 “10~20대 수치도 심각한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마이너스 지표는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대책 강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실제 판사들은 장기 미제를 처리하기보다, 쉬운 사건을 빨리 떼는 식으로 미제율을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오래된 사건은 더 묵히고, 새 사건은 빨리 처리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형사재판의 경우 구속 기간이 최장 6개월이기 때문에, 통상 이 기간 내에 선고를 한다. 구속기간 만료로 피고인을 석방했다가, 실형을 선고해 다시 법정구속을 하는 데 판사들이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민사사건은 이러한 부담이 없다.
법원도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 지난해 말 열린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건처리가 지연되고 있다는 외부 지적이 무겁게 느껴졌던 한 해이기도 하다”며 “사건처리가 늦어져 국민의 권리구제에 부족함이 있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원은 재판부를 늘리는 방법으로 일단 급한 불을 끄겠다는 복안이다. 지난 3월부터 민사소송 단독재판과 합의재판 사물관할 구분을 소가 2억에서 5억으로 높여 단독 재판부에 배당을 늘렸다. 대법원은 재판부가 65.4개 증설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전망했지만 판사 인력이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장기미제사건이 늘어나는 것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 결과다. 다만 최근 들어 급격히 악화됐다는 게 법조계 진단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수년간 걸쳐왔다기보다 최근 3,4년 사이 집중적으로 한 번에 나타난 현상”이라며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는데 마치 터지기 직전의 댐처럼 있다가 한순간 무너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법조계에선 판사들의 인식변화, 동기부여성 인사제도 부재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사건을 어떻게든 떼야 한다는 부담감에 야근을 일상적으로 이어가던 풍경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 부장판사는 “젊은 판사뿐만 아니라 부장도 사건을 예전처럼 열심히 처리하지 않는 것 같다”며 “전반적으로 기성세대, 젊은세대 구분 없이 법관이라는 역할을 직업으로 인식하는 정도가 강화된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법원도 세대 교체로 인해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를 이끌어가기도 쉽지 않은 분위기다. 법원 민사 합의부 배석판사들이 주심당 1주일에 3건 정도 사건만 처리하는 경향성도 굳어졌다.
‘법관의 꽃’이라 불리던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가 사라진 것도 실질적인 계기가 됐다. 동기부여성 인사가 사라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도 많다.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을 하고, 그 중에서 법원장이나 대법관이 나오는 구조에선 부장판사들이 배석판사들을 이끌고 사건을 빨리 떼려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은 승진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 전에는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기록한 인력이 판사로 선발됐지만, 지금은 사법시험이 폐지됐고 일정 기간 동안 경력을 쌓은 변호사들이 법관에 지원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를 훈련하는 도제식 교육 구조도 많이 달라졌다.
한 부장판사는 “초임의 경우 해외연수 선발 시 선호하는 국가로 가고 싶어 하니 어느정도 경쟁이 있다가 지방법원 부장판사쯤 되면 선발성 인사가 거의 없어진다”며 “그러다보니 사기가 침체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꼭 승진 인사가 아니라도 동기가 부여되는 인사가 돼야한다”고 말했다. 반드시 승진제가 아니더라도 지방과 수도권 근무, 해외 연수 등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반면 판사 개개인에게 장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옳지 않다는 반론도 적지 않게 나온다. 또 다른 판사는 “법관은 공식적으로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라고 돼 있다. 문제가 생겼으니 옛날처럼 16,17시간씩 뼈를 갈아서 일하라고 하는 건 맞지 않다”며 “현 상황에 맞게 시스템을 설정해서 대책을 세우면 될 것으로 지금은 과도기라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dingd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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