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를 가다] 600년 전 바이킹족은 왜 그린란드에서 사라졌나
글·사진 김완수 극지방 여행전문가 2022. 6. 30. 09:55
끝없는 유빙의 바다에서 - 연재 끝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은 캐나다의 엘즈미어Ellesmere 섬에 살던 에스키모들이 최단거리인 25km 정도의 버핀만Baffin Bay을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키모라는 용어가 ‘날것을 먹는 사람들’이라며 비하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이들은 ‘이누이트’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시베리아의 에스키모들이 80여 km의 베링해를 거쳐 알래스카로 들어왔고, 알래스카 북부를 지나 캐나다로 이동한 에스키모들이 캐나다 북쪽으로 향해 그린란드 북쪽으로 건너온 것이다.
에스키모나 이누이트를 만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그들이 추운 겨울을 넘기며 수천 년 동안 생존한 이유 중 하나가 주로 바닷가와 강이 만나는 교차점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다는 겨울이 되면 얼어붙어서 물고기, 동물들을 사냥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만, 강은 겨울이 되어도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할 수 있는 지역이기에 식량 확보에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도 에스키모와 함께 겨울의 강가에 나가 두께 40cm의 얼음을 깨고 에스키모 노래를 부르며 낚시질한 경험이 있다.
인간이 사는 최북단 시오라팔루크
세계에서 인간의 자연적 거주지로서 가장 북쪽 마을인 북위 약 78도에 있는 시오라팔루크Siorapaluk. 카나크에서 북쪽으로 약 6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헬리콥터로는 20여 분, 보트로는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카나크호텔 사장이 “내일 시오라팔루크로 주유소 탱크 점검차 헬리콥터가 출발하는데, 갈 생각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반가웠다. 특별히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었는데 기회가 온 것이다.
출발지인 카나크공항에서 이륙한 헬리콥터는 카나크 상공을 지나 시오라팔루크로 향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카나크의 주변 산하. 마치 갯벌처럼 빙하가 녹아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조금 지나니, 이곳저곳에서 수많은 빙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빙하가 흘러내려 산 중턱에 머무르고 있다. 저 빙하 뒤편에는 온통 하얀 빙원이 보인다. 빙하가 흘러내려와 바닷물과 상봉하는 모습과 빙원에서 흘러나온 빙하가 빙하폭포가 되어 다른 빙하로 흘러나오는 모습을 카나크에서 시오라팔루크로 가는 상공에서 20여 분간 감상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빙하 구경을 하늘에서 한 것이다. 시오라팔루크에 다가가는 순간, 빙하는 온데 간데 보이지 않고 새파란 바닷물과 해안을 따라 모래 백사장의 모습과 바닷물이 닿은 드넓은 평지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붓글씨로 휘저은 듯한 기묘한 모래 백사장을 감상하는 동안 시오라팔루크 마을이 보인다. 시오라팔루크란 ‘모래 백사장’이란 뜻이라고 한다.
늑대의 후손 썰매견과 조우
헬리콥터는 마을 언덕에 마련된 헬기장에 내린다. 마을까지는 2~3분 정도 내려가면 된다. 제일 먼저 조그마한 학교가 나타난다.
조그마한 마을로 들어섰다. 빨래를 널고 있는 마을 사람 모습에서 우리와 비슷한 정겨운 생활이 느껴진다. 수십 가구가 사는 마을엔 가게도 있었다. 국기가 펄럭이는 가게 안에는 여느 슈퍼마켓과 비슷하게 여러 가지 생필품을 팔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풀어놓은 썰매견들이 보인다. 갑자기 몇 마리의 썰매견이 다가온다. 묶여 있지 않은 썰매견이 이방인을 향해 주위를 맴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몹시 긴장된다. 내가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 서서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더니, 그제야 꼬리를 흔들며 인정하는 것 같았다. 야생에서 동물을 만날 때는 절대로 도망치지 말고 뒷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기에 그렇게 버티며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래도 썰매견들은 늑대들의 후손이다. 야생에선 자기들끼리 잡아먹기도 한다. 서서히 꽁무니 빼며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벗어났다. 계속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바라보면서…. 조그마한 개울을 지나자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유빙에 스크루 부딪혀 “우드득, 우드득”
피오르드를 거쳐 빙하까지 가는 보트여행은 약 7시간이 소요된다. 1시간 정도 항해했을까…. 선장이 고래가 나타났으니 사진 촬영을 준비하라고 가리킨다. 망원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하고 보트의 선두에서 대기한다. 보트는 정지하다시피 하며 고래에게 다가간다. 그때, 정적을 깨는 고래 숨소리…. 수 미터 높이로 물결이 솟구친다. 두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보트는 고래가 있는 쪽으로 바짝 다가가서 엔진을 끈다. 소음소리에 놀라 고래가 멀리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이다. 갑자기 등을 보인 고래는 멋진 꼬리를 흔들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보트는 목적지 빙하를 향해 전진한다.
피오르드에는 점점 많은 유빙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빙하가 가깝게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트가 유빙 때문에 조심히, 천천히 전진하길 바랐으나, 노련한 선장은 계속 같은 속도로 운항하고 있다.
커다란 빙산이 자주 나타난다. 새끼 꼬듯 꼬아서 올라간 듯한 꽈배기빙산과 크나큰 여객선빙산, 큰 빙산이 작은 빙산을 업은 어부바빙산, 바다에 투영된 삼각형 빙산과 하얀 줄무늬의 산, 검은 머리의 엄지척빙산을 바라보면서 계속 빙하를 향해 전진한다.
많은 유빙들로 인해 가끔씩 보트의 스크루와 부딪히며 “우드득, 우드득” 소리가 나는데, 배가 파손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멀리서 꽤 널찍한 빙하가 보인다. 소형보트는 유빙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빙하에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근접해 배를 정차시킨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수백m 전방에서 빙하와 마주보고 있다. 해마다 지구온난화로 지도가 바뀐다는 이곳 빙하지대. 조만간 저 빙하도 전부 녹아서 랑가Ranga 피오르드의 바닷물과 한 몸이 되겠지….
피오르드의 바닷물 온도를 재보았다. 대기온도는 9°C인데 바닷물 온도는 1°C였다. 바닷속으로 흘러나온 빙하조각들이 녹으며 가지각색의 모양을 만들고 있다. 얼마 후면 사라질 스스로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붉은 머리 에리크의 이주
980년경, 그린란드 남부에 도착한 바이킹족族과 4,000여 년 전, 캐나다를 거쳐 그린란드 북부에 이주해 살고 있는 이누이트족….
그후 바이킹족은 1408년, 그린란드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누이트족은 오늘날까지 생존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린란드 역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길을 따라가 본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이주했던 바이킹인 붉은 머리 에리크Erik the Red, 그의 아버지 토르발드Thorvald는 노르웨이에서 살인사건을 일으켜 민회에서 추방령을 선고받고서 가족을 데리고 얼음의 섬 아이슬란드로 이주했다. 아이슬란드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잘살았다. 아들 에리크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 그 역시 그곳에서 살인을 저질러 민회에서 3년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붉은 머리 에리크는 이번 기회에 서쪽에 섬이 있다는 표류인의 말을 듣고 그 섬을 찾아보기로 했다. 섬의 남쪽에 도착해 3년 동안 섬의 곳곳을 살펴보고 그곳에서 거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추방기간이 지나 돌아온 에리크는 사람들에게 그 섬을 살기 좋은 곳이라 홍보하기 위해 녹색의 땅, ‘그린란드Greenland’라는 유토피아적인 이름을 지어 선전했다. 사실 당시에는 기후가 온화해서 푸른 풀이 자랐고, 농사도 가능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에서 자원에 비해 사람이 많아서 힘들었던 상당수 사람들이 새로운 땅, 그린란드로 떠나기로 했다. 에리크와 함께 500여 명의 사람들이 25척의 배를 타고 980년경, 그린란드로 출항했다. 그러나 무사히 도착한 것은 14척뿐이었고, 그린란드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장을 만들어갔다. 그린란드 남쪽에선 바이킹이 살기 시작했고, 북쪽엔 이누이트들이 서로의 상황을 모른 채, 그렇게 오랫동안 그린란드에서의 삶을 영위해 갔다.
바이킹은 가고, 이누이트는 남고
북쪽 추운 지방에 사는 이누이트들의 지역은 농작물이 자라지 않아서 조상대대로 사냥을 하며 살아왔다. 바다가 그들의 농토였고, 농장이었다. 여름에 잡은 바다생선이나 동물은 건조시켜 겨울 식량으로 사용했고, 옷은 짐승가죽으로 만들어 입었다. 의·식·주 모두를 야생에서 수천 년 동안 사냥, 채집해 해결했던 것이다.
그린란드 남쪽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농사를 지으며 목축과 사냥을 병행하면서 인구를 4,000여 명까지 늘렸다. 그러나 따뜻하던 기후가 점차 기온이 내려가며 빙하기가 찾아오자, 삶의 환경이 급격히 나빠졌다. 정착 후 농사를 짓던 바이킹의 생활방식은 급격히 무너졌다. 풀이 사라지고 농사가 어려워지자 가축들이 죽어갔고, 바이킹의 전통방식으로는 한계가 온 것이다. 그린란드에 들어와 농사에 치중하느라 어업을 포기한 것도 식량사정이 어려워진 것에 한몫했다. 바이킹 후예들은 농사와 목축에 매달려서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하 수십 도의 추위에서도 수천 년간 이어온 이누이트들의 생존기술은 바로 ‘현지화’. 의·식·주를 모두 바다에서, 산에서, 들에서 찾는 그들의 야생野生이 끈질기게 삶을 이어올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바이킹들은 빙하기로 인해 외부와의 단절로 이누이트와 같은 ‘현지화’에 실패했고, 그렇게 사라져간 것이다.
이누이트 여인과 결혼한 일본인을 만나다
세상의 끄트머리, 시오라팔루크Siorapaluk에 일본인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으니 그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20대의 젊은 시절에 여행을 왔다가 사냥이 좋아서 이곳에 주저앉은 사람…. 그리고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여인과 결혼한 사람…. 아무튼 특이한 사람이라 꼭 만나보고 싶었다.
여행 왔다가 눌러앉은 ‘유일한 동양인’
그런데 그는 집에 없고, 바닷가에 있다고 한다. 동네사람과 함께 바닷가 백사장에서 배를 수리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2명 중 한 명이 그 일본인이라고 한다. 반갑게 인사하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나이 75세, 50여 년 전 이곳에 왔다고 한다. 1970년대에 이곳 이누이트 여인과 결혼해 아들 1명에 딸 4명, 그리고 손자까지 10여 명의 대가족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얼굴은 세상의 찌든 때 없이 근심, 걱정 없이 행복해 보였다.
함께 배를 수리하고 있던 사람은 아들이라고 한다. 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 30대의 아들은 아버지와 내가 동양인끼리 나누는 영어대화가 신기한 듯 연신 웃으면서 듣고 있었고, 함께 기념촬영도 했다. 10년에 한 번 정도 고향인 일본에 다녀왔다는 그는 일본에 갔다온 지 상당히 오래된 듯, 그렇게 고향을 오래전에 잊은 것 같았다. 세상의 끝, 그린란드 카나크Qanaq의 북쪽 동네인 시오라팔루크에 살고 있다는 소식이 일본 후지TV에 소개되어서 상당히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딸 두 명은 지금 카나크에 살고 있다고 한다. 시오라팔루크는 인구가 수십 명에 불과한 조그마한 마을이어서 학교나 병원, 사업 등 미래를 위해 수백 명이 살고 있는 카나크로 갔다고 했다. 마치 시골 학생이 더 큰 꿈을 꾸기 위해서 서울로 유학 가듯이 말이다. 거리가 60km 정도 되니까 배로 3시간 정도 소요되고, 겨울이면 개썰매로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서 만족한 듯했다.
극지방 전문여행가라 소개하며 내가 발간한 극지 캘린더Polar Calender와 극지 카드Polar Card를 건네주었다. 일본인은 손자인 듯한 아이에게 웃으면서 극지 카드를 건네주었고, 우리는 극지 캘린더를 들고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옆에서는 이누이트 부인이 빙긋이 웃고 있었다. 이곳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 소문난 일본인. 아들과 함께 배를 수리하고 부인과 손자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현재 40여 명 된다는 마을 주민들은 곧 일본계 이누이트가 대부분 차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하던 중인 배 수리를 아들과 함께 계속한다. 점심식사를 위해 가족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참 행복하게 보였다.
월간산 2022년 6월호 기사입니다.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