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고음역대 소화위해 거세.. 시련 딛고 최고 오페라 가수 우뚝

기자 2022. 6. 3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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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남자의 클래식-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12살때 남성 2차 성징 막아

15살때 로마서 오페라 데뷔

유럽 주요 도시서 관객 압도

250개 음표를 한숨에 불러

16~18세기 유럽에선 여성의 맑고 높은 목소리를 소화할 수 있는 남성 가수들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교황이 지배하던 모든 지역에선 여성이 교회나 오페라 하우스, 심지어 공공장소에서조차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됐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성가대에서는 변성기 이전의 소년이 맑고 고운 미성으로 여성이 불러야 할 고음역대를 대신 노래했다.

그러나 오페라에서는 보이소프라노로 여성의 배역을 대체할 수 없었다. 소년의 작은 키와 체구는 극의 몰입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제아무리 노래를 잘한다 하더라도 소년의 작은 체구로는 오페라에 적합한 충분한 성량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페라에서 여성의 역할을 노래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남성 가수가 바로 카스트라토(남성 거세 가수)이다. 카스트라토의 어원은 라틴어의 카스트라레(Castrare, 거세하다)이다. 2차 성징을 막기 위해서 변성기 이전의 남자아이를 거세시켰던 것이다.

절단하는 방식은 아니었지만 거세시키는 방법 또한 상당히 잔인했다. 아이들의 고환에 상처를 내서 양잿물에 담그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고환은 기능을 상실해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게 되고, 후두와 성대가 자라지 않아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뛰어난 음색의 소년을 선발해 카스트라토로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했다. 당시 일반 시민이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상승시키는 길은 가톨릭의 사제가 되거나 카스트라토가 되는 것이 유일했다. 카스트라토는 성공하기만 한다면 막대한 돈까지 벌어들일 수 있으니 주로 가난한 집안의 부모들이 돈 욕심에 자식들을 카스트라토로 만들기 일쑤였다.

카스트라토가 성행하던 시기 이탈리아에서만 한 해에 4000명에 달하는 아이가 스타 카스트라토를 꿈꾸며 거세를 당했다. 그러나 그중에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할 확률은 1% 미만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카스트라토는 거세만 당한 채 매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으니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고, 근력이 없어 제대로 노동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교회를 전전하며 연명하거나 남창이 되기도 했으며,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영화 ‘파리넬리’의 주인공으로, 파리넬리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진 카를로 마리아 미켈란젤로 니콜라 브로스키(Carlo Maria Michelangelo Nicola Broschi, 1705~1782)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카스트라토로 기록된다. 1705년 이탈리아의 남부 지방인 안드리아에서 작곡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카스트라토가 되기 위해 12살에 거세를 당한다. 당대 최고의 스승 니콜라 포르포라에게서 성악을 사사한 그는 15살이 되던 해, 로마에서 데뷔 무대를 갖고 오페라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영화에서 묘사됐던 것처럼 빈, 베네치아, 런던 등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화려한 기교와 성량으로 관객들을 압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여성 가수들의 음역보다 오히려 한 옥타브 더 높았고, 특히 폐활량이 좋아서 250개의 음표를 한숨에 부를 수 있었으며 1분 이상 소리를 끌 수 있었다고 한다. 음악성에 있어서도 상당히 뛰어나 셈여림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그 어떤 어려운 프레이즈들도 초절기교로 노래했다고 한다.

32살이 되던 1737년, 그는 런던 공연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한 후, 에스파냐로 거처를 옮겨 국왕이었던 펠리페 5세의 곁에 머물며 궁정음악가의 지위를 누렸다. 54살이 되던 1759년, 이탈리아 볼로냐로 돌아가 음악가와 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살다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3년 로마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카스트라토를 금지하면서 다행히 더 이상 카스트라토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스트라토는 인간의 이기심과 일그러진 탐미욕이 만들어낸 불행한 역사이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오페라와 벨칸토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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