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냄의 미학, '전원일기'에서 '우리들의 블루스' 김혜자 [홍종선의 배우발견㉕]

홍종선 입력 2022. 6. 30. 09:22 수정 2022. 9. 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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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자 ⓒ

“그래, 이 맛이야.”


1962년 KBS 1기 공채 탤런트로 출발해 60년을 한결같이 배우로 살아온 인물의 연기력을 감히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도 MBC 드라마 ‘전원일기’로 22년간(1980년 10월~2002년 12월 방영) 한 자리를 지키고, 영화 ‘마더’(2009)로 신들린 연기가 무엇인지 모성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배우를 얕은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배우 김혜자의 연기는 매번 새로웠지만, 개인적으로 세 번의 충격을 또렷이 기억한다. 1982년, 사춘기 시절에 청소년관람불가 영화 ‘만추’(감독 김수용)를 본 영향만은 아니었다. TV에서는 이름도 없이 양촌리 김 회장댁 인자한 안방마님인데, 스크린에서는 살인죄로 복역 중인 모범수로 특별휴가를 받은 혜림이다. 그 스산하고도 텅 빈 느낌의 혜림의 격정적 사랑, 2년 후에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다 왔던 것처럼 홀로 호숫가를 떠나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드라마 '청담동 살아요' 스틸컷 ⓒ

그리고 30년 뒤, 영화 ‘마더’ 이후,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2011년 12월~2012년 8월 방영)에서 마주한 김혜자 역의 배우 김혜자는 ‘김혜자가 장르다’라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 시트콤에 나온다는 것도 새롭지만, 그 연기의 결이 더욱 새로웠다. 드라마 ‘전원일기’ 안방마님의 단아함과 희생, 영화 ‘만추’의 공허함이 오롯이 느껴지는데 너무 웃기다. 아니, 그래서 더 웃음이 터진다. 진정한 희극은 비극에 깃든다는 것을 일깨우듯, 목소리와 몸짓에 과장됨이 전혀 없음에도 어떤 코미디 연기보다 더 웃기다.


세 번째 충격은 다시금 김혜자일 때였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2019년 2~3월 방영)에서 나이 든 김혜자 역을 맡았는데, 자신의 젊은 영혼이 깃든 연기를 하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단지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이 ‘소녀스러울’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앳된 연기가 아니라 젊은 김혜자를 연기하는 한지민이 ‘올드 김혜자’ 캐릭터에 겹쳐 보였다. 한지민을 흉내 내는 연기도 아니고 젊은이를 흉내 내는 연기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리따운 스물다섯 아가씨 김혜자였다. 감탄도 잠시,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들쳐업고 회한을 푸는 장면은 폭포 같은 눈물로 지켜봤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연기가 가능할까, 이 이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

그런데 배우 김혜자는 스스로 연기의 정점을 업그레이드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2022년 4~6월 방영)에서다. 남편과 딸을 바다에서 잃고, 하나 남은 아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겠다고 아들 친구 아버지의 ‘첩’을 자청해 ‘똥기저귀 종살이’만 25년을 감당한 옥동 씨, 결과는 아들의 한 맺힌 분노와 화풀이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일과 말기 암인 인생. 아들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아리면서도 사과하지 않는 엄마.


여자의 정조라는 윤리 프레임이 여전한 세상에서 이해받을 구석이 없어 보이는 옥동 씨를 시청자에게 설득해내기란 실로 힘든 상황인데, 배우 김혜자는 해냈다. 자신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언성 높여 주장하고 눈물로 호소해서가 아니다. 덤덤하게 모든 비난을 받아내는 것으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 살아가는 것으로, 본인은 술병에 적힌 만화수복을 반밖에 읽을 줄 몰라도 아들만큼은 한자어의 뜻까지 아는 사람으로 키워낸 것으로 소리 없이 웅변한다.



영화 '마더' 스틸컷 ⓒ

‘우리들의 블루스’ 속 옥동 씨 연기가 각별히 소중한 이유가 있다. 지금도 양촌리에 가면 변함없이 ‘전원일기’ 김 회장 부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주저하면서도 단호하게 선택하고 제목 그대로 늦가을처럼 쓸쓸하지만 상처받지 않을 만큼 단단한 ‘만추’ 혜림의 느낌, 흔한 뜨거운 신들린 연기가 아니라 차갑고 텅 빈 빙의를 우리 눈앞에 보여준 ‘마더’의 도준 엄마, 비감으로 골계미가 빛나는 해학을 빚는 ‘청담동 살아요’의 김혜자, 그리 마음을 먹으면 칠십 대 노인이 이십 대 아가씨로 보이는 마술을 부리는 김혜자가 가능했던 ‘배우 김혜자’의 비결이 언뜻 보여서다.


처음에 밝혔듯 감히 60년 내공 연기를 평하고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개인적 생각이라는 전제 아래 그 비결은 ‘비워냄’이다. 김혜자의 비워냄은 단지 자신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캐릭터를 채우는, 흰 도화지에 캐릭터를 그리는 일차원적 비움이 아니다.


비움 반 채움 반, 공즉시색의 연기 ⓒ

배우 김혜자는 자신을 비워내고 캐릭터를 받아들인다기보다 언제나,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게 비어 있다. 마치 일상이 없고 늘 배우로만 사는 사람처럼, 아니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사는 집을 옮겨갈 뿐 현실적 인물이 아닌 것처럼 ‘배우로 존재’한다.


더욱 중요한 비워냄은 자신의 방안에 새로 들인 캐릭터마저 꽉 채워 연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22년을 매주 봐도 질리지 않고, 그래서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득한 슬픔과 웃음을 주되 자신은 꽉 채워져 있지 않은 게 가능하다. 아들 동석의 만물상 트럭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그 공허한 눈빛에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백 마디 말보다 더 선명하게 발견한다.


과장과 강조의 총체라 할 광고에서조차, 천연 아니고 인공감미료 광고에서조차 그런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기에 “그래, 이 맛이야”는 참말로 다가온다. 광고모델 김혜자의 진실함은 스스로 만든 미덕이기도 하다. 편의점 도시락 하나를 광고해도 관심과 애정으로 책임감 있게 감수하니, 소비자들은 만족스러운 제품을 호평할 때 ‘혜자스럽다’고 말하게 됐다.


오래도록 사랑 받는 명배우의 촬영현장 ⓒ

비어 있되 멀리 있지 않고, 쓸쓸하되 불친절하지 않고, 말없이 시장 바닥에 앉아 나물을 팔면서도 손으로는 검은 비닐봉지에 한 줌 더 넣어주는 옥동 씨의 따스함이 깊게 전해오는 까닭이 바로 김혜자 자신에게 있다.


눈물 콧물 범벅으로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다가, 극 종반에 이르러 옥동 씨의 이야기를 3부작으로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엄습했다. 이 명연기를 오래 봐야 하는데…. 내 가족이 아닌데 수명을 생각하게 할 만큼 드물게 귀한 배우 김혜자. 건강 잘 챙기셔서 대체 불가능한 연기를 계속해서 보여주시길 앙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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