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대기업과 부자만을 위한 '나쁜 자유'를 경계한다

안호기 논설위원 입력 2022. 6.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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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의 등대’가 다시 불을 밝힐 가능성이 커졌다. 게임업계는 이미 변형된 주 52시간제를 시행 중이다. 일이 많은 주에는 노동시간을 늘리고, 적을 때는 줄여 주 평균 52시간만 맞추면 되도록 했다. 게임업계 경영진이 최근 이 같은 선택근로제와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을 늘려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앞서 고용노동부가 주 52시간제 연장근로시간을 월 단위로 바꾸는 것을 핵심으로 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내놓자 기업들이 발빠르게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안호기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35차례 언급했던 ‘자유’ 개념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이 말하는 자유였다. 윤 대통령은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경제학자이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규제를 완화해 민간주도 성장을 하겠다는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은 신자유주의 기조를 따르고 있다.

정부의 노동개혁 추진에 따라 게임업계 선택·탄력 근로제 단위시간이 연장되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게임 출시가 중요한 게임업체로서는 원하는 시기에 새 상품을 내놓을 수 있어 수익이 늘어날 수 있다. 반면 게임 개발자들은 ‘나중에 쉬게 해주겠다’는 지시에 따라 집중적인 고강도 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판교의 게임업체들은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등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기업에 주는 꼴이다.

노동자의 죽거나 다치지 않을 권리도 침해받을 위기에 처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시행한 지 5개월밖에 안 됐음에도 기업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완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국민의힘은 안전 인증을 받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는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처벌을 낮춰주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해놓고 있다. 실제 처벌도 미약하다. 노동부는 법 시행 이후 지난 27일까지 중대산업재해가 사망사고 84건(91명), 질병사고 2건 발생했다고 밝혔다. 중대재해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인 사건은 절반이 안 되는 40건뿐이고, 그나마 기소된 사건은 1건에 그친다. 나머지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입건됐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22%로 인하해 투자를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구상은 일부 대기업에만 혜택이 돌아갈 우려가 크다. 나라살림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정책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보면 현재 최고세율 25%를 적용받는 기업은 80여개뿐이다. 2020년 기준 법인세를 신고한 83만8000개 기업의 0.01%이다. 정부는 대기업 법인세를 깎아주면 투자와 이익이 증가하고, 중소기업에도 혜택이 돌아가는 낙수효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과거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친기업 정책에 따른 낙수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이미 드러났다.

일부 고가 주택 보유자가 내는 종합부동산세도 부담이 내려간다. 종부세 과세 대상자는 절반 가까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집주인에 대한 혜택을 늘리는 내용의 ‘임대차 시장 안정 방안’도 내놨다. 한결같이 부자들의 세부담을 낮춰주는 정책이다.

대기업과 고소득 개인의 세부담을 낮추면 세수가 줄어들 게 뻔하다. 정부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로 세수가 2조~4조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과표구간 조정으로 최저세율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 세수 감소폭은 더 커질 수 있다. 세수 감소는 정부 재정여력을 약화시켜 복지에 쓰일 예산마저 줄어들게 한다. 취약한 시민과 기업의 자유를 증진할 공적 기능이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경제사회학자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유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있다고 썼다. 나쁜 의미로는 무제한으로 동료를 착취하려는 자유, 과도한 수익을 올리려는 자유, 과학기술 발명을 공익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자유 등을 꼽았다. 국가 규제가 대거 풀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횡행하는 자유를 오래전에 예견했다. 반면 양심·언론·집회·결사·직업선택 등은 입법활동을 통해 지켜야 할 좋은 자유이다.

지난 한 세대를 휩쓸었던 신자유주의는 수탈과 착취의 깊은 상처를 남긴 채 퇴장을 준비 중이다. 그래서 윤 대통령이 <선택할 자유>를 추천하자 1980년대 사고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더 과거인 1940년대로 돌아가 <거대한 전환>에서도 영감을 얻을 수 있으니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윤 대통령이 대학 시절 심취했다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명언도 새기길 바란다.

안호기 논설위원 haho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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