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유연화에 '판교의 등대' 재현되나

게임업계 '전원 출근' 회귀
정부 노동정책에 편승해
밤샘노동 관행 부활 우려
노조 유무 따라 양극화 될 듯

2016년 7월21일 오후 11시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에 입주한 게임업체 건물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윤석열 정부가 ‘주 52시간제 유연화’를 예고하면서 희미해지던 ‘판교의 등대’(판교지역 게임업체의 노동 강도가 강해 밤새도록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음을 빗댄 용어·사진)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게임업계가 이달부터 ‘전원 출근’으로 돌아선 데다 ‘주 52시간제’마저 무력화될 경우 노동조합이 없는 중소 정보기술(IT)·게임업계 종사자들의 노동시계가 과거로 회귀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크런치모드’ 부활하나

29일 국내 IT·게임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가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밝히면서 노동자들 사이에 고강도 근무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염려가 번지고 있다. 2018년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게임업계에는 ‘크런치모드’라는 악명 높은 근무 관행이 있었다.

크런치모드는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초장시간 근무’를 뜻한다.

실제 젊은 개발자들이 크런치모드 때문에 과로사하는 일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2017년 과로사한 한 개발자는 한 주에 95시간55분이나 일했다. 바뀌지 않던 업계 관행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착하고 포괄임금제가 줄어들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월급 외 연장근로 수당, 휴일 근무 수당 등 각종 수당을 미리 산정해놓은 ‘포괄임금제’ 대신 기업들이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하면서 무리한 야근과 밤샘노동 관행이 잦아든 것이다.

현재 게임업체는 최대 석 달까지 주 평균 노동시간만 52시간을 넘지 않을 경우 ‘집중 노동’을 할 수 있다. 사용자가 노동자 대표와 합의하면 정산단위가 최대 6개월인 ‘탄력적 시간근로제’도 가능하다. 하지만 게임업계 사용자들이 최근 정부에 탄력근로제는 1년, 선택근로제는 6개월로 늘려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져 노동환경 악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이를 수용하면 게임업계 노동자들은 길게는 6개월 이상 초장시간 근무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여전히 주 52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현실인데 정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들을 과도한 노동으로 내몰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 양극화 심화될 듯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노동개혁이 IT·게임업계 노동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네이버, 카카오, 라인플러스 등 주요 IT 기업들은 현재 원격근무, 휴양지 워케이션, 주 4회 근무 등의 파격적 근무 조건을 내걸었다. 게다가 노동조합이 있어 노동법이 바뀌더라도 사측의 무리한 노동 요구를 거부할 힘이 있다.

반면 게임업계는 넥슨, 웹젠, 스마일게이트 등 규모가 큰 업체에만 노조가 설립돼 있다. 노조가 없고, 포괄임금제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중소 IT·게임업체 노동자들은 악화된 노동환경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는 셈이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게임 하나로 회사의 존망이 결정되는 작은 업체들에서는 ‘크런치모드’가 되살아날 수도 있다”면서 “결국 양극화가 심해져 개발자들은 작은 업체들을 꺼리고 대형 IT·게임기업으로 인력이 쏠리게 돼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들의 인력난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노영호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웹젠 지회장은 “정말 ‘주 52시간 근무제’가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인지 조사와 연구를 거쳐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