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라는 이름의 '불안'

한겨레 2022. 6. 2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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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난 3월14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 앞 광장에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관계자들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경쟁교육 고통 해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

성장기 자녀를 둔 학부모는 ‘취약계층’이다. 그들 가슴에 저마다 투명 명찰을 달고 있는데 ‘마음불안학교’에 재학 중이라 적혀 있다. 한국 사교육은 불안한 마음이 키운 거대 시장이다. 학원은 세련된 영업전략으로 불안을 증폭하며 공생한다. 그런데도 부모들에게 학원은 신경안정제와 같다. 교육소비자 역할에 몰두하면 교육경쟁이 불러일으킨 불안과 압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다.

구원예정설의 핵심 내용은 구원의 방식을 오직 신만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저 지칠 줄 모르는 신앙심을 유지하면서 신의 영광에 복무하는 직업노동에 충실히 종사해야 한다. 의심 없는 믿음과 실천. 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신자의 바람직한 자세다.

현대 한국의 ‘학벌교’가 이와 똑 닮았다. 자녀의 구원을 위해 학부모는 사교육계 ‘1타 강사’를 교주로 섬기며 매달릴 수밖에 없다. 성공에 대한 믿음을 지켜가며 일상의 불안을 견디는 것이다. 사회학자 김형준은 이런 현상을 두고 ‘연명교육’이라 이름 붙인다. 비록 확률은 낮을지라도 자녀의 학업 성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가정의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교육을 이른다.

연명교육은 이루지 못한 내 욕망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행동일 수 있다. 또한 경쟁사회에서 뭐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부모의 도리’가 사교육 참여 행동에 깔린 윤리적 바탕을 이룬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 나도 그랬고,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부모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우리가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매년 10월, 신입생 지원자와 부모님이 쓴 입학지원서를 읽는다. 가장 많이 만나는 이야기는 ‘탈옥 서사’다. 부모 세대가 경험한 무한경쟁 반복 개미지옥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결단이 우리 학교 지원 동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한다.

크게 작심하여 홍해를 건넜지만, 대안학교라는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넘쳐나지 않는다. 결단은 시작일 뿐 ‘어떻게’ 진정한 학부모로 거듭날 것인가를 알려주는 이는 거의 없다. 학교에서는 “이제부터 자녀들을 함께 키워야 한다”면서 믿고 지켜보라 한다. 입학 뒤 한두해 아이들을 관찰해보니 자유를 누리면서 친구들과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뭘 안 해도 부모의 예상보다 훨씬 심하게 안 하는 것으로 보여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지난 6년간 약 400명의 학부모를 만났다. 각종 위원회 회의, 학부모 연수, 포럼, 공동작업, 술자리, 개별 면담, 발표회, 독서회, 간담회, 지역모임, 마을축제, 장터,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만나 갖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자발적 비주류’를 선택할 만큼 강단지고, 의식도 깨어 있는 학부모들이었다. 그럼에도 학부모가 대안학교와 청소년의 성장에 관해 웬만큼 몸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6년이 걸린다. 졸업을 앞둔 즈음 프로젝트 발표회를 참관하면서 부모들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꼬리를 닦는다. 지난 세월 불안 속에서도 참고 기다리며 말없이 자녀를 지원했던 자신을 위한 다독거림의 눈물이리라.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달하려는 것은 지식, 기술, 태도다. 학교에서 지식을 전수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다. 물론 지성으로의 전환을 이뤄내기엔 여전히 어려움이 있지만. 자격증을 주지 않는 기술의 전수는 고난도 교육이다. 예를 들어 의욕 없는 모둠원들을 챙겨서 프로젝트 수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아이의 사회적 기술에는 최고 점수를 줘야 한다. 낯선 이를 대할 때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를 보여주는 아이는 어떠한가. 올바른 지식, 기술, 태도를 전수하기 어려우므로 학교는 가장 손쉽게 관리하기 좋은 시험과 경쟁체제 속으로 학생과 부모들을 밀어 넣었다. 한국 사회가 헛된 공정체계에 휘둘린 계기다.

청소년들 곁에서 지켜보니 아이들 발달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고, 정답도 없다. 광활한 우주에서 일어나는 행성들의 움직임은 뉴턴이 제시한 운동법칙 세가지로 모두 설명할 수 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양상은 우주의 움직임보다 광대하고, 불규칙하며, 불안하다. 학부모 연수의 끝자락에서 키르케고르의 이 말을 자주 전한다. “불안은 자유라는 이름의 현기증이다.” 불안 속에서 아이를 혼자 맡기는 어렵다. 교사와 학부모가 손 붙잡고 함께 키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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