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 항암 걸림돌 'T세포 탈진', 유전자 '차단 스위치' 찾았다
미국 글래드스턴 연구소, 저널 '캔서 셀'에 논문
(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인간의 면역계에서 T세포는 외부 침입자를 찾아내 공격하는 최전선의 전투병 역할을 한다.
그런데 암이나 만성 염증 같은 난적을 만나 싸움이 오래가면 T세포의 공격력이 떨어진다. 과학자들은 이를 'T세포 탈진'(T cell exhaustion)이라고 한다.
T세포는 독특한 표면 수용체를 통해 공격 대상을 식별한다.
침입자의 정체를 알리는 분자(항원결정기)가 이 수용체와 결합하면 T세포는 활성화해 공격 태세를 갖춘다.
문제는 같은 분자와 T세포 수용체의 결합이 수주 내지 수개월 지속하면 T세포의 면역 반응이 약해지고, 암세포나 병원체를 파괴하는 힘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T세포 탈진은 면역 항암치료에도 결정적 장애가 된다.
면역 항암제에 잘 반응하지 않는 암 환자는 대부분 T세포가 탈진 상태라고 봐야 한다.
암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가 T세포 탈진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데 매달려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침내 미국 과학자들이 T세포 탈진을 제어하는 '유전자 스위치'를 찾아냈다.
연구팀은 T세포 탈진을 차단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이 발견은 반응률이 높지 않은 면역 항암치료의 효과를 획기적으로 증강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미국 글래드스턴-UCSF(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유전체 면역학 연구소 과학자들이 주도한 이 연구 결과는 지난 23일(현지 시각) 저널 '캔서 셀'(Cancer Cell)에 논문으로 실렸다. 이 연구엔 스탠퍼드대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이번 연구의 초점은 무엇이 T세포 탈진을 일으키냐에 맞춰졌다.
연구팀은 먼저 크리스퍼(CRISPR-Cas9) 유전자 편집 가위로 T세포 탈진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하나하나 조작했다.
또 장기간의 수용체 결합 이후 어떤 T세포가 더 지치고 어떤 T세포가 덜 지치는지도 검사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T세포 탈진에 깊숙이 관여하는 유전자들을 가려냈다.
T세포 유전체 전반을 뒤져 탈진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찾아낸 건 처음이라고 연구팀은 밝혔다.
과거에 과학자들은 단지 몇 개의 유전자가 항구적으로 켜지거나 꺼짐으로써 T세포 탈진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새로운 사실을 암시하는 연구들이 잇따라 나왔다.
다시 말해 수천 개의 T세포 유전자가 한꺼번에 켜지거나 꺼지는 과정이 진행된다는 걸 시사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최근 제기된 가설을 뒷받침한다.
T세포 탈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염색질 리모델링 인자'(chromatin remodeling factor)라는 후성유전 조절 인자(epigenetic regulator)였다.
후성유전은 DNA 염기서열이 변하지 않은 채 유전자 발현이 조절되는 걸 말한다.
DNA 염기 중 하나인 시토신에 메틸기가 붙는 'DNA 메틸레이션', DNA가 감겨 있는 히스톤의 메틸화 변형 등이 대표적이다.
연구팀이 찾아낸 조절 인자들도 DNA 구조를 재구성해 수백 개의 유전자를 한꺼번에 켜지거나 꺼지게 했다.
연구팀은 생쥐 모델에 전달된 T세포를 놓고 이들 조절 인자를 하나하나 끄는 '노크 아웃'(knock-out) 실험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특별히 중요해 보이는 몇 개를 추려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Arid1a이다.
암 종양이 생긴 생쥐에서 이 조절 인자의 발현을 차단하고 보름이 지나자 T세포 수위가 높아지고 종양은 작아졌다.
분자 수준에서 볼 때 이런 생쥐의 T세포는 탈진 상태라기보다 계속 활동하는 정상 면역세포에 가까웠다.
실제로 암 환자의 T세포에서 Arid1a 같은 조절 인자를 조작했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지 이해하려면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들 조절 인자를 직접 조작하거나 이들이 제어하는 유전자를 간접 조작했을 때 기대에 못 미치는 면역 항암제의 효과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게 확인됐다.
이번 연구는 또 면역계가 만성 바이러스 감염증을 퇴치하게 돕는 새로운 치료법 개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강조했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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