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노동개혁에 '판교의 등대' 재현되나..게임업계 우려

이윤정 기자 입력 2022. 6. 29. 16:40 수정 2022. 6. 2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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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1일 오후 11시 판교 테크노벨리에 입주한 게임회사 건물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윤석열 정부가 ‘주 52시간제 유연화’를 예고하면서 겨우 희미해졌던 ‘판교의 등대’(밤새도록 게임업체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아 붙은 별명)가 되살아날 위기에 처했다. 원격근무, 휴양지 워케이션(일+휴가) 등 파격 근무 조건을 내건 대형 IT기업들과 달리 게임업계는 이달부터 ‘전원출근’으로 돌아서면서 판교에서도 엇갈린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 ‘주 52시간제’마저 무력화되면 노동조합이 없는 중소 IT·게임업계 종사자들의 노동 시계는 과거로 회귀하고, 업계 내 노동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개발자 과로사 내몬 ‘크런치모드’ 부활하나

29일 국내 IT·게임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부가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사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밝히면서 업계 노동자들 사이에 고강도 근무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염려가 번지고 있다. 2018년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게임업계에는 ‘크런치모드’라는 악명 높은 근무 관행이 있었다. 크런치모드는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영양 섭취, 위생, 기타 사회활동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업무를 지속하는 ‘초장시간 근무’를 뜻한다.

실제 젊은 개발자들이 크런치모드 때문에 과로사하는 일들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근로복지공단은 2017년 ‘크런치모드’로 과로사한 20대 개발자의 사례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기도 했다. 당시 과로사한 개발자는 한 주에 95시간55분이나 일했다. 그럼에도 바뀌지 않던 업계 관행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착하고 포괄임금제가 줄어들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월급 외 연장근로 수당, 휴일 근무 수당 등 각종 수당을 미리 산정해놓은 ‘포괄임금제’ 대신 기업들이 초과근무 수당을 지급하면서 무리한 야근과 밤샘노동 관행이 잦아든 것이다.

게임업계는 이미 노동자가 선택권을 갖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에 따라 주52시간 초과 근무를 하고 있다. 업체에 따라 최대 석달까지 주 평균 노동시간만 52시간을 넘지 않으면 ‘집중 노동’을 할 수 있다. 사용자가 노동자 대표와 합의하면 정산단위가 최대 6개월인 ‘탄력적 시간근로제’도 가능하다.

게임업계 사용자들은 최근 정부에 정산단위를 탄력근로제는 1년, 선택근로제는 6개월로 늘려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이를 수용하면 게임업계 노동자들은 길게는 6개월 이상 초장시간 근무를 해야할 수도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사실 판교의 등대가 꺼진 이유는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재택근무제도가 시행되면서라고 봐야 한다”며 “여전히 주52시간이 지켜지지도 않는 게 현실인데 정부는 여기에서 더 노동자들을 과도한 노동으로 내몰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IT·게임업계 노동 양극화 심화될 듯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노동개혁이 IT·게임업계 노동 양극화만 심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네이버, 카카오, 라인플러스 등 주요 IT기업들은 현재 원격근무, 휴양지 워케이션, 주4회 근무 등의 파격적 근무 조건을 내걸었다. 게다가 노동조합이 있어 노동법이 바뀌더라도 사측의 무리한 노동요구를 거부할 힘이 있다.

반면 게임업계에서는 넥슨, 웹젠, 스마일게이트 등 규모가 큰 업체에만 노조가 설립돼 있다. 넥슨 관계자는 “노동조합이 있어 사측에서 무리하게 근무시간을 요구할 수 없다”면서 “법이 바뀐다고 갑자기 근무조건이 크게 바뀌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주요 IT·게임기업은 포괄임금제를 폐지한 만큼 법정 한도만큼 초과 근무를 늘리면 수백억원 단위의 인건비가 추가로 들어가게 된다.

노조가 없고, 포괄임금제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중소 IT·게임기업 노동자들은 악화된 노동환경에 그대로 노출될 수 있다. 게임업계 관계자는 “게임 하나로 회사의 존망이 결정되는 작은 업체들에서는 ‘크런치모드’가 되살아날 수도 있다”면서 “결국 양극화가 심해져 개발자들은 작은 업체들을 꺼려하고 대형 IT·게임 기업으로 인력이 쏠리게 돼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들의 인력난은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노영호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웹젠 지회장은 “단순히 경영진 이야기만 듣고 과거로 노동정책을 되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정말 ‘주52시간 근무제’가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인지 조사와 연구를 거쳐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맡대고 정책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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