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그래프] (7) 중앙대 정성훈 "농구 늦게 시작하는 후배들에 희망의 아이콘 되고파"

조형호 2022. 6. 2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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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고 뽑아 주세요" 2022 KBL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완생을 꿈꾸는 대학 졸업반 미생들의 농구 인생을 조명해본다.
 

[점프볼=조형호 인터넷기자] 일곱 번째 미생은 중앙대 정성훈(C, 200cm)이다. 운동을 늦게 시작한 이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싶은 정성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등학교 2학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농구공을 잡은 정성훈
정성훈은 어릴 적 평범한 학생이었다. 활동적인 것을 선호하지 않았고 친구들과 놀거나 공부를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느 고등학생들처럼 입시나 진학에 고민을 품으며 일상을 보내던 그는 큰 신장으로 인해 농구부 동아리에 가입했다. 이후 농구에 흥미를 가지며 농구 관련 직종을 꿈꿨다.

그런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정성훈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마추어 농구대회 준비를 위해 훈련을 하러 간 곳에 당시 부산중앙고 소속 박영민 코치가 찾아왔다. 또래에 비해 큰 신장을 가진 정성훈에게 박영민 코치는 농구선수의 길을 제안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면 슬슬 진로에 대해 고민할 시기잖아요. 저도 평범한 학생이었으니 마찬가지였어요. 그나마 관심을 가졌던 게 농구라 선수 트레이너나 구단 직원이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그러다가 마침 박영민 선생님께 농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그날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던 것 같아요.”

정성훈은 일반 학교에서 부산중앙고로 전학을 택하며 농구 인생의 시작을 알렸다. 피지컬은 좋았지만 기본기나 전술 이해도가 없던 그는 혼나고 부딪히며 기량을 쌓아 나갔다. 당시 양홍석(현 KT), 서명진(현 현대모비스) 등 선수층이 두꺼워 경기에 자주 나서지는 못했으나 정성훈은 동료들의 플레이를 보며 의지를 불태웠다.

#힘든 시기에 손을 내민 중앙대,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다
정성훈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개인 사정으로 인해 전학을 갔다. 수도권 지역을 알아보던 그의 선택은 낙생고등학교였다. 전학으로 인해 1년 출전 금지 징계를 받은 정성훈의 경기력은 떨어졌고, 낯선 환경은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정성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농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심적으로 힘든 상황이 닥치니 포기하고 싶기도 했어요. 근데 사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농구를 시작하면서 큰 결심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포기하기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고, 잘 버텨서 대학교까지 가보자는 다짐으로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힘든 시기의 연속이었는데 중앙대에서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코치님들께서 농구로 중앙대를 가는 것은 일반 학생들이 서울대를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너무 기쁜 마음에 곧바로 중앙대 진학을 선택했죠. 중앙대 입학이 결정되고 짧았던 농구 인생을 돌아봤는데 농구를 늦게 시작해서 부족한 부분이 많겠지만 걱정보다 기대가 앞섰던 것 같아요. 제 인생을 바꿔 주신 선생님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도 컸죠.”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정한 백넘버, No.41
기대를 안고 중앙대 유니폼을 입은 정성훈은 신입생 초반부터 많은 기회를 잡았다. 리그에 스타팅 라인업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고, 적지 않은 출전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경험이 많지 않았던 그는 기본기의 부족함을 드러내며 실수를 남발하는 등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동 포지션의 박진철(현 데이원)에게도 밀려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입학 후 부진을 거듭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지만 농구를 늦게 시작한 만큼 남몰래 구슬땀을 흘린 정성훈은 MBC배를 계기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MBC배에 기회를 잡은 정성훈은 양형석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며 기량이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그는 팀 내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스스로 운동 능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빅맨치고 경기 조율이나 흐름을 읽는 능력도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이런 자신감이 경기장에서 드러나다 보니까 조금씩 감독님의 신뢰를 받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아직 슈팅 능력이나 공격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남은 대학 기간 동안 제 단점을 보완해야죠.”

4학년이 된 정성훈은 박인웅, 문가온과 함께 팀의 주축이 되어 성공적인 리그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빅맨답지 않은 경기 조립과 보이지 않는 공헌도로 팀을 묵묵히 이끌었다. 올 시즌 평균 6.1점 6.4리바운드 3.6어시스트로 눈에 띄는 기록은 아니었음에도 팀 내 에이스인 박인웅과 문가온이 폭발적인 공격력의 요인을 정성훈의 도움으로 꼽을 정도로 그의 헌신은 상당했다.

“오세근 선배님이나 덕 노비츠키를 좋아해요. 그래서 등번호도 41번을 달고 있고요. 함지훈 선수도 존경하는데 이분들의 공통점은 피벗 플레이로 쉽게 득점을 올리고, 빅맨임에도 농구 센스가 엄청나시잖아요. 저도 우리 팀 선수들의 공격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센스 있는 플레이로 팀원들을 살려주는 농구를 하고 싶어요.”

 

#다듬지 않은 원석에서 보석이 되는 그날까지
농구를 늦게 시작한 탓에 남들보다 배로 땀을 흘려야 했고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정성훈은 굳은 의지를 보였다. 미생에서 완생이 되길 꿈꾸고 있는 그는 야심찬 포부를 드러내며 프로 진출에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다는 게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위축되는 요인이었지만 이제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일 뿐입니다. 앞으로 남들보다 성장할 시간이 더 많다고 받아들이고 더욱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사실 처음에는 제가 프로농구에 도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이제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데 이왕 도전하는 거 멋있게 해보고 싶네요(웃음). 운동을 늦게 시작하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그 친구들에게 귀감이 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성공 사례로 기억되고 싶어요. 프로에서 안 밀리고 끝까지 살아남는 희망적인 아이콘이 돼야죠(웃음).”

뒤늦은 정성훈의 농구 인생이 빛을 볼 수 있을까. 희망의 아이콘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정성훈의 앞날을 주목해 보자.

# 사진_ 점프볼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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