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현을 잃고도, 그게 '은폐'인지 아직 모른다고요? [이준희의 여기 VAR]

이준희 2022. 6. 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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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하다 보면 때론 생각지 않게 사실을 쉽게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민감하고 내밀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상대방이 먼저 털어놓을 때가 그중 하나다.

숨길 거라 생각한 사실을 술술 말하는 취재원을 싫어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해당 사실이 심각한 문제일 경우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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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여기 VAR]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국가대표와 청소년대표로 뛴 고 최숙현 선수가 2013년 전국 해양스포츠제전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 최숙현 선수 유족 제공

취재하다 보면 때론 생각지 않게 사실을 쉽게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민감하고 내밀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상대방이 먼저 털어놓을 때가 그중 하나다. 일하는 입장에선 고맙다. 숨길 거라 생각한 사실을 술술 말하는 취재원을 싫어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쓰리다. 해당 사실이 심각한 문제일 경우엔,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체육대학교(한체대) 역도부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을 취재할 때도 같은 경험을 했다. 최아무개 역도부 코치가 기숙사에서 학생들을 폭행했고, 이로 인해 경찰에 고소를 당했다는 내용을 취재하면서 한체대 쪽에 연락했다. 학생들에게 고소 취하 등을 요구하는 “조직적 은폐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지만, 학교에서 쉽게 말해주진 않을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연락이 닿자, 한체대 쪽은 고소 취하 이야기부터 꺼냈다. 조준용 한체대 교무처장은 “학생, 학부모님들과 담당 지도교수가 접촉해서 되도록 합의해 정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저 또한 학교 대표로 학부모님 뵙고 학생들 만나서 되도록 조용히 처리했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학생들 입장에선 그게 회유, 압박으로 느껴지지 않겠느냐’고 되묻자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게 가능하겠느냐”면서 “은폐 시도는 절대 아니다”라고 했다.

약 2년 전 고 최숙현 선수가 스포츠 폭력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도, 비슷한 은폐 시도가 다른 동료들을 상대로 끝없이 이뤄졌다. 남은 동료들은 가해자, 가해자 가족, 다른 선배 등에게 계속 전화와 문자로 압박을 받았다. 그때도 은폐 시도는 총이나 칼을 들이밀고 이뤄지지 않았다. “조용히 해결하는 게 좋지 않겠냐”, “우리도 잘못은 있지 않냐”는 식이었다. 그들도 이걸 설득이라고 생각했다.

최숙현 선수를 잃고 나서야, 우리 사회는 그걸 ‘은폐’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국민체육진흥법에 스포츠 지도자는 스포츠 폭력 등을 알았을 때 관계기관에 신고할 의무가 있다는 ‘의무 신고’ 규정을 마련했다. 이른바 ‘최숙현법’ 핵심 조항이다. 법 시행 1년이 지났지만, 한국 최대 엘리트 체육 산실이라는 한체대는 최숙현법 내용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법 위반 사실마저 그렇게 기자에게 술술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최숙현법이 유명무실화한 건 스포츠계 전반적 문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난해 9월 경북 예천에 있는 중학교에서 선배 양궁 선수가 후배에게 활을 쏘는 일이 발생했지만, 피해자 가족이 폭로에 나서고 언론 보도가 난 뒤에서야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스포츠인권연구소는 이 당시 “학교와 지도자가 국민체육진흥법을 위반했다”며 “더 근본적인 범위와 단위에서 조사와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문제는 잊혔고 9개월 만에 다시 불거졌다.

한체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스포츠 폭력 피해자들은 “최숙현 선수가 떠난 지 2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변한 게 전혀 없다”고 한탄했다.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로서 면목이 없었다. 쉽게 쓰인 기사도 때로는 부끄러울 수 있다. 그게 전혀 변하지 않은 우리 사회 민낯을 다시 봤기 때문이라면 말이다.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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