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인간 컴퓨터'였던 여성.. 인류를 달에 보낸 건 그들의 계산이었다

기자 2022. 6. 2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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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경의 ‘우주여행 2022’

인간 컴퓨터? 미국·소련 우주개발 경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로 돌아가 나사(미 항공우주국)를 방문해 ‘컴퓨터실’ 문을 열어본다면 다들 어리둥절할 것이다. 빼곡히 들어찬 컴퓨터 대신 사람, 그것도 여성들이 책상에 앉아 펜과 단순한 기계식 계산기를 사용해 무언가 계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테니 말이다.

원래 컴퓨터라는 단어는 계산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인공위성을 우주에 띄우고 사람을 달에 보내기 위해서는 방대하고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지금이야 우리에게 익숙한 (기계) ‘컴퓨터’로 척척 계산해 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기계식 계산기는 덧셈, 뺄셈 등 단순 계산만 가능했다.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는 에니악(ENIAC)도 커다란 덩치와 기계적인 복잡함에 사용하기 매우 어려웠다. 논리적이고 복잡한 계산을 빨리해내기 위해서는 아직 인간의 두뇌가 더 효율적인 시대였다. 그래서 나사는 계산 능력이 뛰어난 여성을 고용했고, 그들의 노력과 성취를 바탕으로 마침내 인간은 달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왜 하필 여성이었을까.

이보다 수십 년 전인 1900년대 초, ‘하버드 컴퓨터’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버드 천문대 대장이던 에드워드 피커링이 관측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위해 만든 그룹이다. 아무리 획기적인 이론이라도 관측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저 가설에 불과하므로 관측 자료 분석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자료 수집과 분석을 보조적이고 단순한 노동이라 여겼고, 피커링은 교육받은 여성들을 저렴한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바로 이 하버드 컴퓨터들이 현대 천문학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발견을 한다. 별과 성운 등 천체를 목록화한 윌리어미나 플레밍과 은하까지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며 주기가 광도에 비례하는 별)을 발견한 헨리에타 스완 레빗의 업적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피커링은 여성이 남성보다 계산과 분석에 탁월한 소질이 있기에 고용한 것일까.

20세기 중반까지 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설사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연구자로 활동할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교사였던 플레밍은 미국에 이민 후 가정부로 일하는 중이었고, 레빗은 그나마 대학 졸업 후 곧바로 합류했으나 보조업무로 취급해 매우 낮은 급여를 받았다. 그녀의 발견 역시 당대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의 다음 세대이자 우주가 보이지 않는 물질, 즉 암흑물질로 가득 차 있다는 증거를 제시해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베라 루빈조차도 젊었을 때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프린스턴 대학원에 지원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나사의 ‘인간 컴퓨터’ 여성이 받는 차별과 편견은 2016년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50년 이상 지난 지금의 상황은 어떨까.

어린이가 그린 그림을 통해 과학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분석하는 실험이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어린이가 그린 과학자 중 여성은 1% 미만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28%까지 증가했다고 한다.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고 하기엔 수치가 아쉽다. 조금씩 깨져가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직업군에 대한 성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과학과 공학을 공부하는 여성의 비율이 꾸준히 늘어남에도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 등의 이유로 학업이 미뤄지거나 현장에서 연구를 지속하기 쉽지 않다. ‘2019년 우리나라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 보고서를 보면 채용 시점의 여성 비율은 26.2%지만 재직은 20.7%, 그리고 관리직은 10.6%까지 낮아진다.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유리천장은 여전히 건재하다.

‘Run Like a Girl.’ 몇 년 전에 본 광고 영상의 제목이다. 소녀처럼 뛰어보라고 했을 때 청소년과 어린이가 보이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어린이들은 ‘소녀’처럼 뛰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저 열심히 뛸 뿐이다. 결국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도, 깨는 것도 교육이다. ‘과학자’라는 단어 앞에 더는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없는 세상이 언제쯤 올지 궁금하다.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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