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궁 상징 용머리 기와, 왜 서해 뻘밭서 나왔을까

노형석 2022. 6. 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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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주민 조개 캐다가 첫 발견..추가 유물도 나와
조선 전기 왕실, 실질 고증 가능한 유일한 출토품
왕실 발원 건축물 쓰려고 배에 싣고 가다 난파한 듯
태안 청포대 해수욕장 갯벌에서 나온 용머리 기와(취두). 조선 초기의 왕궁 지붕마루에 붙였던 장식기와로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뻘밭에서 조개를 캐는데 이상한 물건이 나왔습니다.”

지난 2019년 9월 충남 태안 해양경찰대에 급박한 신고 전화가 울렸다. 조개잡이 명소로 유명한 태안군 양잠리 청포대 해수욕장 인근에 사는 중년 남성 주민한테서 온 것이었다. 썰물로 드러난 갯벌 해변에 노모와 함께 나가서 아침 저녁 찬거리로 쓸 조개를 캐다가 호미날에 묵직한 덩어리가 툭 걸렸다는 내용이었다. 표면에 무언가 가득 새겨진 게 보여 꺼내려 했지만, 너무 무거워 묻힌 덩어리를 들어올릴 수는 없었고 일단 스티로폼 부이를 묶어 표시만 해놓고 나왔다고 했다.

당장 출동한 해경 직원들은 주민이 가리킨 지점을 찾아가 갯벌에 묻힌 덩어리를 끙끙거리며 끌어올렸다. 무게는 50㎏이 넘었다. 펄흙을 털고 보니 용 같은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게 보였다. “아무리 봐도 문화재 유물 같습니다. 군청에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해경의 권유로 주민은 다시 태안군청 문화예술과에 이를 알렸고, 군청 쪽은 문화재청에 발견 사실을 통보했다. 며칠 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태안 해양문화재보존센터로 의문의 물건이 넘겨졌다. 연구소 전담 연구사들은 물건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그동안 실체를 전혀 몰랐던 500년 전 조선 초기 왕궁의 상징으로 지붕마루를 장식했던 핵심 부재인 용머리 장식기와(취두)의 아래쪽이었던 것이다. 양기홍 연구사는 유물을 처음 본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만듦새가 굉장히 정교했어요. 바깥쪽 표면엔 용머리가 새김되어 있고, 안쪽 내면은 장인이 손으로 밀어서 매끈하게 문지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단박에 지방이 아닌 중앙에서 만든 최고급 제품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고려기와를 전공한 이인숙 연구관은 “유물이 나온 갯벌 부근에 다른 장식기와 유물들을 더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구소 직원들이 유물을 발견한 주민을 찾아가자 그는 신고한 뒤로 또 다른 유물 몇점을 더 찾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갯벌에서 찾아서 갖고 있던 잡상 조각 한점을 건넸고, 유물이 발견된 곳 근방에 또 다른 취두 조각이 묻혀있는 곳도 안내했다. 눈에 불이 켜진 연구소 쪽은 다음 해인 2020년 레이더 탐사를 벌여 장식기와가 나온 곳에 최소 여덟개의 이상체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지난해와 올해 본격적인 조사 끝에 마침내 2019년 주민이 발견한 장식기와와 딱 맞는 취두 위쪽과 이 취두에 결합된 또 다른 장식기와 검파까지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서해 뻘밭에서 튀어나온 조선 초기 왕궁 건축의 놀라운 상징물인 이 용머리기와들이 세상에 나온다. 태안 양잠리 청포대 갯벌 일대를 조사중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지난 5월 발굴한 용머리 장식기와의 윗부분과 지난해 6월 출토한 칼자루 모양 장식품으로 취두 상단에 따로 붙였던 검파(劍把)를 29일 오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할 예정이다. 취두(鷲頭)란 궁궐 등 왕실 관련 건축물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하는 대형 장식기와이며, 검파는 취두 상단에 꽂는 칼자루 모양의 토제 장식품이다.

이번에 공개하는 취두 상단과 검파는 지난 2019년 조개 캐던 주민이 발견해 신고한 장식기와 하단과 딱 맞게 결합되는 얼개다. 지난해 6월 연구소가 인근 지역에서 추가로 발굴한 또 다른 장식기와 유물(상하단)과도 쌍을 이루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검파가 발굴되면서 건물 용마루에 올라가는 취두 전체가 온전한 모습 그대로 모두 출토됐다.

태안 청포대 갯벌에서 나온 용머리 기와(취두)의 다른 한쪽. 조선 초기의 왕궁 지붕마루에 붙였던 장식기와로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었다.
출토된 취두 아래 쪽 유물을 3디(D) 스캔해 찍은 이미지다.
지난해 태안 갯벌을 시굴조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검파 유물. 취두의 상단에 꽂는 장식 기와의 일종이다.

그동안 학계에서 알지 못했던 15~16세기 조선 전기 궁궐의 용머리 장식기와가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처음 확인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조선 왕실 궁궐 건축에서 건물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는 핵심 부재 중 하나인 지붕마루의 장식기와 연구에 중요한 실물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크다. 이뿐 아니라 14세기 창건기의 경복궁과 숭례문, 양주 회암사 터 등 조선 전기 왕실 관련 건축물 세부 모습에 대한 실질적 고증이 가능한 유일한 고고학적 출토품이란 점도 주목된다.

발굴된 구름무늬 검파는 길이 40.5㎝, 폭 16㎝, 두께 7㎝의 칼 손잡이 모양이다. 앞뒷면에 2단으로 구름무늬(雲紋)가 새겨졌다. 취두 상단의 네모난 구멍과 끼워 맞출 수 있게 짧은 자루를 갖췄다. 빗물이 취두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용도로 쓰였고, 취두에 새겨진 용이 지붕을 물어 더 이상 용마루를 갉아먹지 말라는 의미도 있다고 전해진다. 구름 무늬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창덕궁 인정문 등 조선 후기 궁궐 지붕 용머리 장식기와에 일부 남은, 문양 없는 간략한 막대(棒) 모양 검파와 형태상으로 다르다는 점을 특기할 만하다. 한쌍의 취두 하단부에 돋을새김된 용 무늬도 갈퀴의 표현 방식과 구렛나루 사이 돌기 개수 등에서 차이점이 보인다. 연구소 쪽은 “조선 전기만 해도 국가적으로 규격화한 형태의 용 도상을 엄격하게 적용했던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발굴조사 지역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
태안 갯벌에서 나온 왕궁 장식기와 유물들의 출토 현황도. 700 대 1 축적이다.
조선시대 궁궐 지붕의 장식기와들을 확대한 사진 설명도. 창경궁 명정문에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왜 조선 왕궁의 상징이자 최고의 건축부재인 용머리기와와 검파가 서해안 태안의 뻘밭 속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연구소 쪽은 한눈에도 기와 유물들의 새김 방식이나 조형성이 최고의 격조를 갖춘 것이어서 명백히 서울의 관영 공방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잘라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실과 관청의 기와를 생산했던 공방은 조선 태조 때부터 있었는데, 애초엔 서울에 동요와 서요로 나눠 운영하다 와서라는 이름으로 통합해 조선 성종 1년인 1469년 첫 운영 기록이 나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와서의 위치가 지금의 용산구 신용산역과 이촌동 들머리 일대로 이전한 대통령 집무실이 자리한 용산공원 부근이며 현재 푯말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동훈 연구소 연구관은 “아마도 용산 부근의 와서에서 생산된 최고급 장식기와를 지방에 왕실이 발원한 사찰이나 관영건물지에 쓰려고 싣고 가다 배가 난파되면서 태안 갯벌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특정 건물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창덕궁 인정문 지붕마루에 있는 취두.
덕수궁 함녕전 지붕 마루에 있는 취두.

연구소는 8월 중순까지 해당 지역 추가 발굴조사와 수중탐사를 벌여 용기와 관련 유물들이 더 있는지를 확인할 계획이다. 왕실 고급 유물인 취두가 출토된 만큼 이를 싣고 갔을 조선 전기 운반선의 잔해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어 앞으로의 발굴 성과도 관심을 모은다. 조선 왕궁의 상징인 용머리 기와 같은 최고급 건축부재가 왜 서해 갯벌 속에서 출현했는지 미스터리가 풀릴 수 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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