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방통쾌하면서도 후배에겐 춘풍처럼 따뜻했던 전설적 '두목'

기자 2022. 6.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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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부장, 전북 정무부지사, 국무총리 비서실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대곤 선배님을 처음 만난 것은 55년 전인 1967년, 제가 13살 까까머리 전주북중 1학년 때였습니다.

제가 두 달 먼저 청와대에 갔으니 전주북중-전주고-성균관대-동아일보-청와대까지 다섯 번에 걸친 인연에서 평생 처음 제가 앞서 본 셈인가요? 김 선배님은 평소 "기만아, 다섯 번 인연 맺었다. 혈육이다. 그러나 관뚜껑 못 박는 순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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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어느 날 청와대에서 행사를 마치고 같이 선 공보비서관들. 왼쪽 두 번째가 김대곤, 오른쪽 끝이 필자. 필자 제공

■그립습니다 - 김대곤(1948∼2022)

동아일보 부장, 전북 정무부지사, 국무총리 비서실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대곤 선배님을 처음 만난 것은 55년 전인 1967년, 제가 13살 까까머리 전주북중 1학년 때였습니다. 전주북중-전주고는 반장회의를 합동회의로 했습니다. 김 선배님이 전주고 3학년, 학생회장이었습니다. 멀리서 보니 지금 생각하면 쿠바의 카스트로나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 아니 적어도 양산박의 두목 송강(松江) 정도는 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알고 보니 그의 별명이 실제로 ‘두목’이었고, 전주북중 때도 학생회장이었습니다. 전주 출신 언론인 모임 전언회(全言會)의 6대 회장(초대 회장은 고 박권상 동아일보 주간), 전주고-성균관대 모임인 행송회(杏松會)에서도 긴 기간 회장이었으니 직업이 두목이었던 셈입니다.

1973년 성균관대에 입학하니 성대 법대의 두목 김 선배님이 또 나타났습니다. 군에 다녀온 복학생이었던 선배는 까만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불온서적으로 의식화 교육을 시켰지요. 제가 2학년 말 유신반대 시위로 1975년 말 군에 강제 징집되면서 잠시 헤어졌습니다. 1981년, 제가 동아일보 기자가 됐습니다. 김 선배님은 동아일보 5년 선배 기자로 또 거기에 흘립(屹立)해 계셨습니다. 전주북중-전주고-성균관대-동아일보로 계속되는 5년 선후배 도표가 완성됐습니다. 제가 동아일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고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에게 밉보여 1994년부터 1년간 월간 ‘신동아’에서 파견근무를 하게 됐는데, 신동아부 부장이 또 김대곤이었습니다.

저는 1999년 3월 동아일보를 떠나 김대중 대통령 청와대 ‘해외언론비서관’이 됐습니다. 아마도 제가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출신인 게 고려됐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달 후인 5월에 김 선배님이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오시더군요. 제가 두 달 먼저 청와대에 갔으니 전주북중-전주고-성균관대-동아일보-청와대까지 다섯 번에 걸친 인연에서 평생 처음 제가 앞서 본 셈인가요? 김 선배님은 평소 “기만아, 다섯 번 인연 맺었다. 혈육이다. 그러나 관뚜껑 못 박는 순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마다 “제발 그 말씀 마시라”고 했는데, 바보처럼 꼭 그 말만 지키고 가셨습니다.

기자 김대곤이 가장 힘들여 노력했던 것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를 살해한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재조명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계획된 거사로, 김 전 부장을 의인으로 본 거죠. 김 전 부장을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관련 책을 세 권이나 낼 만큼 열정을 바쳤습니다. 김 선배가 전북 정무부지사에 부임한 첫날,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 부탁헙니다. 난 김꼰대라고 헝께.” 운전기사가 깜짝 놀라 “아니 부지사님 존함이”라고 하자 “내 이름을 거꾸로 하면 꼰대잖여요”. 이 한마디로 기사는 무장해제되고, 평생지기가 됩니다. 선배님은 그런 분입니다. 따뜻한 말씀, 호탕한 웃음과 매력 만점의 살인미소, 넉넉한 가슴, 그리고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었던 멋진 사나이. 남자 중의 남자.

영결식 유족 인사에서 아들 준하(38·변호사) 씨가 “학창시절 아버지를 거의 뵌 적이 없었다.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들어오시니”라고 솔직히 말할 만큼 기자 직업에 자부심도 크고 철저했던 천생 저널리스트. ‘카로 미오 벤’으로 시작되는 술좌석에서의 걸쭉한 노래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멋진 낭만주의자, 끝 갈 데 없는 포용력으로 선후배를 감쌌던 김대곤 선배님, 영면과 안식을 기원합니다.

김기만 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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