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위치에 선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만화로 본 세상]

2022. 6. 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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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사생활 99
강원도를 여행하던 친구가 ‘망향의 동산’을 알려준 적이 있다. 횡성 망향의 동산은 횡성호 아래에 잠긴 마을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전시관에는 물레, 피아노, 텔레비전 등 마을의 한구석을 담당해왔을, 오래된 물건들이 적막하게 놓여 있다.

<지역의 사생활 99 : 부산편> 한 장면 / 삐약삐약북스


횡성호를 담고 있는 횡성댐은 강원도 내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됐다. 서울을 위해 만든 건 팔당댐이다. 팔당호 아래에도 물에 잠긴 마을인 우천리가 있다. 팔당호도, 횡성호도 처음부터 호수는 아니었다. 이미 아는 내용인데도 물 아래에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 만다. 물론 망각 역시 특권이다. 자신이 살던 생활 터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호수는 사무치는 장소다. 망향의 동산을 돌아보던 친구는 전시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북받쳐 그만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마치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처럼.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 내게 지역의 서사는 무지 속에 잠긴 이야기를 하나둘 건져내는 수몰지와도 같다. 삐약삐약북스에서 출간한 〈지역의 사생활 99〉 시리즈에 빠져든 것도 이 때문이다. 만화를 넘겨 보면서, 같은 땅에 있는지조차 잊고 지냈던 지역의 이름들을 불러보았다. 내게 여행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이름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 처음으로 누군가의 삶터로서 감각됐다.

〈지역의 사생활 99〉는 만화가 ‘불키드’와 ‘불친’이 함께 세운 출판사 삐약삐약북스에서 기획한 만화 시리즈다. 비수도권 지역을 기반으로 창작된 이야기들을 제각기 짧은 만화로 묶었다. 기획의 묘가 돋보이는 지점은 첫 페이지다. 모든 책의 첫 장에 해당 지역의 교통 정보, 역사, 간단한 소개와 응급실 정보를 기록해 놓았다. 지금까지 고성, 단양, 옥천, 부산, 강릉 등 18곳의 이야기를 발간했다.

그중 최근 시선을 잡아끈 건 〈지역의 사생활 99〉 ‘양산편’ 〈키르케고르와 법구경〉(약국 지음)이다. 작중 주인공은 도시 재개발을 담당하는 공무원 경민과 재개발로 곧 내쫓길 위기에 처한 자영업자 은수다. 단편 영화를 함께 제작하기도 했던 이들은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날치기로 처리된 재개발 협상,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 불공정한 재개발 과정을 목도하던 은수는 법구경(法句經) 앞에 선다. 법구경에는 이렇게 써 있다. “아득한 어둠 속에 묻혔다면 촛불을 밝혀 불안을 걸으라.”

경민과 은수는 정반대의 위치지만 용기를 내 조금씩 다가간다.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고자 말을 건다. 그들 대화의 시작이다. 경민과 은수가 자리한 공무원과 자영업자의 간극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거리를 연상시킨다. 서로 다른 위치에 선 이들의 삶 모두를 바라보며 은수가 묻는다.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라고.

지독한 이기심은 때로 서 있는 곳과 누리는 것 모두를 망각하게 한다. 이런 인식은 공동체의 감각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게 한다는 점에서 유해하다. 우리는 정말 어떻게 살고 있고, 또 어떻게 연결돼 있나. 한쪽만 착취되고 상실하는 일방적인 관계 맺음은 아니었을까. 여러 질문을 뒤로하고 은수는 일단 촛불을 밝히기로 한다. 아득한 어둠을 조금이라도 헤치기 위해, 실패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구겨지지는 말자고 다짐하면서.

조경숙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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