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는 의사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메디칼럼](16)
2022. 6. 29. 08:28
지금 이 순간에도 개발도상국의 외과의사들은 수술용 실 하나도 아껴 쓰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여러 사람을 살리고 있다. 과연 내가 이들보다 훌륭한 의사인가?
어릴 때, 전설 속에 나올 것 같은 침술사 할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 풍수지리와 한의학 등 잡다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특이한 분들과 친분이 두텁던 외삼촌 덕분이다.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 저학년이었을 때라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방문해 침술로 여러 사람을 치료했던 기억이 난다. 분명히 정식 한의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몇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구당 선생 같은 분이 아니었나 짐작해본다. 몇년이 지나 그 할아버지를 신문지상에서도 뵐 수 있었다. 기사는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제압했다는 내용이었다. 후에 외삼촌께 여쭤보니 그 할아버지는 급소를 눌러 소매치기를 제압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침술에 동경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침 한자루만 가지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아픈 사람을 낫게 해주고 불의한 자는 벌을 준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소년이 어디 있겠는가.
에티오피아 국제협력의사 시절 이야기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실제 의료현장의 외과의사에겐 일어나기 힘들다. 국제협력의사로 에티오피아로 갔을 때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장 큰 한국 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외과 전문의 자격을 따자마자 부푼 꿈을 안고 아프리카의 최빈국, 그곳에서도 가난한 사람들만 오는 시립병원으로 떠났다. 정작 레지던트 때 배웠던 수술기법을 사용하거나 환자에 최신치료를 제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다. 야구공만 한 갑상선 종양을 떼면서도 바늘이 달린 실을 2~3개만 써야 했다. 전기 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그야말로 메스와 가위만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위궤양에 의한 천공으로 환자가 죽는 사례를 본 적이 없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수술은 잘 끝났지만 영양을 공급해줄 수 없어 결국 전해질 장애가 오는 바람에 환자가 죽는 경험도 했다.
나보다 일년 먼저 온 선배 안과의사는 오히려 한국과 더 가까운 방식의 치료를 시행할 수가 있었다. 기본적인 안과 진찰 도구와 안약만 있으면, 수술도 국소마취로 하니 본인이 직접 마취하고 수술하는 것까지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한국에서 큰 안과병원을 운영하는 원장이 때때로 봉사하러 와 대규모 캠페인을 벌였다. 백내장 수술을 하고, 오지에 기구를 직접 가지고 가서 개안수술 및 감염성 안질환 예방 활동까지 벌이는 걸 보면서 정말 보람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기도 했다. 오지에 의료봉사를 나가도 외과의사는 전신마취를 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간단한 수술밖에 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한국이었다면 국소마취만으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대형수술을 어쩔 수 없이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저 일반의처럼 약물처방에 만족해야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에티오피아에 외과의사가 필요하리라 생각해 개발도상국에 외과의사를 파견했지만, 실제로 그 나라에서 부족한 의사는 오히려 안과의사였다. 생명과 관계없는 안과 질환까지 부족한 의료자원을 공급하기는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에티오피아에서 한명의 외과의사로 적응한다고 했지만, 현지 외과의사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과 다른, 어떤 특별한 시도도 거의 하지 못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복강경 프로젝트도 지금 돌아보면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몇년 전 한국의 대형병원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 생체 간이식 수술을 전파하려는 움직임이 유행처럼 번진 적 있었다. 한국의 생체 간이식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바이러스성 간염에 감염된 사람들이 많아 간경화나 간암의 유병률이 높았다. 국제협력의사를 다녀온 경험 때문에 이런 프로젝트에 회의적이었다. 간이식처럼 고도로 자본집중적인 의학기술이 과연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보건의학적 환경을 따졌을 때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한명에게 간이식 수술을 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2만~3만달러의 비용이 들 텐데, 차라리 그 돈으로 B형 간염 백신 사업을 한국과 같이 펼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 나라에도 간이식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가 채 되지 않는 나라에서 한정된 의료자원을 간이식을 위해 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마음이 무거워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방영하는 의학 드라마는 대부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외과나 흉부외과의 천재적 외과의사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사례가 많다. 마치 그런 의사들만 있으면 죽어가던 환자가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다. 환상이다. 중증질환을 가진 환자가 병원에 처음 와서 잘 치료받고 나아서 사회에 복귀하려면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과정마다 전문적인 의료시스템이 필요하다. 의사는 그 과정 중 중요한, 한가지 과정을 담당할 뿐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을 잘 운영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선진국의 의료와 개발도상국의 의료
에티오피아를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 지금은 대학병원에서 장기이식 수술을 하고 있다. 이 일이 자랑스럽다. 전 세계 어느 장기이식센터 못잖은 성적을 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한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성과가 아니다. 우리 병원이 특출나게 잘해 이룬 결과도 아니다. 한명의 침술사가 전국을 누비며 활동할 수 있던 시대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장기이식이 이뤄질 정도로 대한민국이 과거에 비해 잘살게 됐다는 의미뿐일 수도 있다.
이렇게 선진국에서는 현대의학의 꽃이라는 장기이식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한사람에게 투입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개발도상국의 외과의사들은 수술용 실 하나도 아껴 쓰며 최소한의 비용으로 여러 사람을 살리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과연 내가 이들보다 훌륭한 의사인가? 부자나라, 발달한 의료시스템의 덕을 보지 못했다면, 어렸을 적 보았던 그 침술사 할아버지보다 이 사회에 더 도움이 되는 존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최병현 양산부산대병원 간담췌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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