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매혹적이고 애틋한 박찬욱표 청록빛 사랑 '헤어질 결심'
※ 스포일러 주의
모든 인간이 마음 깊숙한 곳에 품은 어둠이 가진 위험한 매력을, 누구보다 감각적이고 매혹적으로 끌어내는 박찬욱 감독. 이번에도 형사와 용의자를 통해 그들 사이 이뤄질 수 없는 형태의 사랑을 어느 때보다 매혹적으로 그려냈다. '헤어질 결심' 속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순간, 도덕 등 온갖 장벽이 붕괴되며 '마침내' 주인공들의 감정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
산 정상에서 한 남자가 추락해 사망하는 변사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와 마주하게 된다. 서래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고, 경찰은 보통의 유가족과는 다른 서래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해준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탐문과 신문, 잠복수사를 통해 서래를 알아가면서 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한편 좀처럼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래는 상대가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준을 대한다.
영화는 불면증으로 잠이 부족해 안개가 자욱한 도로 위 차선을 넘나들며 위험하게 운전하는 해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불면증과 안구건조증을 앓는 해준의 정신적·물리적 시야는 때때로 뿌옇게 흐려진다. 안개는 시야도, 경계도 흐리게 만든다. 해준은 죽은 남편의 용의자로 서래를 의심하고 관찰하지만 점차 그 경계가 흐려진다. 의심에서 관심으로 나아간 감정은 용의자와 형사라는 경계를 지우고 그들을 서로에게 감정적으로 다가가게끔 만든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해준은 죽음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물이다. 형사라는 직업적 특성상 살인사건과 시체와 자주 마주하고, 살인사건 현장의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들여다본다. 잠을 자지 못해 잠복근무하는 해준의 삶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닌 것 같은 상태다.
이는 아픈 엄마를 자기 손으로 보내고,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운명을 가진 서래도 비슷하다. 서래는 해준이 끌리는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여자다. 삶 속에 존재하지만, 그들 주변에는 죽음이 맴돌고 있다. 두 인물과 그들의 삶, 그리고 서로에 대한 감정은 마치 파랑과 초록을 오가는, 영화에 주요한 색인 청록색과 같다. 영화 후반 초록으로도 보이고 파랑으로도 보이는 서래의 모습은 삶과 죽음 사이 위태롭게 놓인 미래를 보여주는 듯 보인다.
해준은 심문하고 잠복근무를 하며 서래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자신도 모르게 의심과 관심 사이를 오간다. 중국인인 서래는 한국말을 잘하지만 때때로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단어 하나에도 미묘하게 뉘앙스가 달라지는 게 '말'인 만큼 서래의 말은 미묘하게 뉘앙스가 달라지거나 어긋나는 상황을 만들기도, 이런 말이 때로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미묘하게 명확한 지점에 다가가지 못하기도 한다.
마치 그들이 서로에게 감정을 갖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서로의 곁을 미묘하게 맴도는 것처럼 서래의 말이나 둘 사이 대화도 그러하다. 그래서 서래의 말보다 눈빛에 더 집중하게 된다. 말에서는 오해와 의심이 생길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눈빛은 뉘앙스가 아닌 그 감정으로부터 발화되고 오롯이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준 역시 그런 서래의 눈빛에 빠져든다. 서래 곁에서야 비로소 단잠에 빠져든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그 속에 스며든 애정은 말이나 생명이 아닌 무생물의 스마트 기기를 통해서야 직접적으로 전해진다. 그것이 의심이든 관심이든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상대를 관찰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며든 마음을 기록한 스마트 기기에는 오히려 솔직한 감정이 담긴다. 이러한 점에서 스마트 기기는 제3자적 입장에서 그들의 내밀한 감정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장치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재밌는 지점 중 하나는 다양한 시점숏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시체의 눈, 휴대폰 화면 등 죽은 존재, 사람이 아닌 생물, 무생물의 시점숏이 등장하는데, 이는 해준과 서래의 행동은 물론 그들의 사랑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들의 사랑은 어떻게 포장하든 불륜의 형태다. 해준 역시 도덕과 신념,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관객 역시 불륜이라는 외피에 갇힐 수밖에 없는데, 다양한 시점숏을 등장시키면서 관객의 시점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형태에 이입해 다각도로 바라보게 만든다.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헤어질 결심'은 전반적으로 진입장벽을 낮췄다. 폭력이나 섹슈얼리티의 수위 역시 낮아졌다. 대신 은근하게 섹슈얼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계속해서 풍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미소, 호흡,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작은 행동 등에서 직접적인 성적 행위나 시각적인 자극은 보이지 않지만 간접적인 표현을 통해 더욱더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직접적인 표현이나 접촉이 없기에 둘의 감정은 오히려 더욱더 애틋하고 매혹적이다. 해준이 부인과는 직접적인 신체접촉과 표현을 하지만, 섹슈얼하거나 에로틱하다는 분위기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해준의 신경과 마음이 오롯이 쏠린 서래를 바라보는, 해준을 마음을 갖고 싶은 서래가 해준을 바라보는 시선, 서로에게 스며든 상대의 행동들이 더 에로틱하게 다가온다.
둘의 사랑이 더 애틋하게 다가오며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들이 헤어질 결심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해준은 도덕과 신념을, 서래는 자신을, 그리고 그런 해준과 서래는 서로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 과정은 힘겹고, 다른 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해준은 용의자를 쫓기 위해 마치 산을 오르듯 어딘가를 오르고 또 오른다. 전반부 해준은 살인 용의자 산오(박정민)을 잡기 위해서 계속 높은 곳을 향해 오른다. 그러나 사랑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 산오는 사랑을 위해 추락하며 죽음을 맞는다.
이처럼 영화 속 사랑들은 전부 붕괴하고 추락한다. 전반부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해준이 심리적으로 붕괴된 것처럼, 산처럼 쌓인 모래들이 붕괴되어 가는 가운데 사랑하는 해준을 위해 헤어질 결심을 한 서래도 붕괴된다. 초록과 파랑이 뒤섞인 청록색처럼, 바다인지 산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해준은 안개가 앞을 가린 것처럼 서래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처럼 헤어질 결심을 한 이들의 사랑이기에 더욱 여운을 남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과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떠오르게 하는 '헤어질 결심'은 전반적으로 고전적인 연출과 사운드 효과를 사용하며 더욱 클래식한 이미지를 풍긴다. '현기증'과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 같은 장면이나 요소들도 엿보인다. 여기에 청록색의 이미지와 특유의 미장센, 판타지적인 시퀀스, 복잡하게 서래와 해준을 오가는 편집, 유머와 진지함을 오가는 완급 조절 등을 통해 관객들을 이 매혹적인 수사 로맨스에 빠져들게 만든다.
배우들의 열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박해일과 서래는 각각 해준과 서래를 통해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데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그러했듯이 특히 탕웨이가 돋보인다. '친절한 금자씨' 금자 역 이영애, '박쥐' 태주 역 김옥빈, '아가씨' 히데코와 숙희 역 김민희와 김태리 등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여자들은 사회와 미디어가 규정하는 단일한 여성성과 달리, 배우가 가진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배우의 매력을 최대한도로 보여줬다.
박찬욱 감독에게는 여배우를 보는, 기존 영화가 보지 않거나 보려 하지 않았던 여배우의 매력을 찾아내는 선구안이 있다. 이번에도 탕웨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 그 이상의 매력이 영화와 서래를 통해 마침내 드러났다. 이러한 탕웨이를 만나고 나면 박찬욱 감독이 과연 다음 영화에서는 어떤 여배우의 우리가 몰랐던 매력을 한껏 끌어내 보여줄지 기대할 수밖에 없다.
138분 상영, 6월 29일 개봉,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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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zoo719@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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