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평] 산내 골령골의 죽음을 기억하며
죽음조차 기억되지 못하는 주검이 있었다. 말할 수 없으니 침묵하는 것밖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죽은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전의 산내 골령골에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보도연맹원들과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 등을 합해 1800명 이상, 최대 70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집단학살 당해 암매장된 8곳의 집단학살지가 있다. 군인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이후 1950년 9월 인민군의 우익 인사 처형으로 이어졌고, 9·28 수복 이후에는 다시 부역자의 명단에 오른 사람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래서 산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필자가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참혹한 진실을 접하게 된 계기는 염인수(1912-2006)의 장편 기록소설 '깊은 강은 흐른다'(도서출판심지, 1989)를 읽으면서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대전의 농사시험장에 직장을 잡은 염인수는 대전과 충남 지역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1947-1949년 사이에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문학잡지에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염인수는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사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대전형무소에 체포되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자신이 겪은 끔찍한 집단학살의 스토리를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다.
'깊은 강은 흐른다' 중 '제2동 20호실'이라는 소제목 아래 실린 이야기는 염인수가 집에 찾아온 형사에게 끌려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취조를 받는 과정과 죽음의 수렁에 내몰리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염인수의 회고에 따르면, 형무소 재소자들을 트럭에 태우기 위해 감방문이 열린 순간 그는 무릎이 마비돼 일어설 수 없었고 간수가 미처 이 장면을 보지 못하고 감방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염인수는 기적처럼 살아남았지만, 그 후로 오랜 세월을 부역자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런데 증언과도 같은 염인수의 이야기에는 죽을까 두려워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나이 어린 소년의 모습이 있고 친구의 권유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단체에 가입했다가 끌려온 청년도 있었으며 면장이냐고 윽박지르길래 맞는 게 두려워 면장이라고 인정해버린 부면장을 지낸 사나이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들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그들 역시 7000명이 넘는 희생자들에 포함되어 골령골 골짜기에 묻혀 온전한 묘비도 갖지 못하고 이름도 잊히고 아픔도 외면당한 것은 아닐까. 산내 골령골의 이야기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바로 이 현실이 전쟁의 상처와 역사의 고통이 여전히 실재하는 현재진행형의 장소임을 삭아가는 뼈로써 증명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 안에서 만난 공간은 화려하고 장엄한 구조였던 듯하다. 선사시대의 거대한 고인돌부터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 진시황릉이나 인도의 타지마할 등은 죽음을 품고 있는 공간이 힘과 권력에 연결돼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실생활에 필요 없는 공간이 크면 클수록 그 공간은 권력의 상징이 된다고 했던가. 그와 대척점에서 골령골의 죽음을 다큐멘터리나 소설, 시와 마당극 등으로 기억하는 지역의 예술인들이 하나둘 목소리를 모으고 있는 걸 보면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가 얼마나 숭고한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왕의 법을 어기고 오빠의 장례를 치른 안티고네가 가장 윤리적인 주체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마땅히 인간다운 도리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도리는 아픔을 보듬고, 슬픔을 위로하고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죽음의 공간이 아직은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애도의 역사는 내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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