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Zoom 人] "어르신들께 장수사진 선물, 주민 마음 열어"

서지민 2022. 6. 29. 05:1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농촌 Zoom 人] 완주자연지킴이연대 정주하 대표
사진작가이자 대학교 사진과 교수
마을 이장까지 맡아 끊임없이 소통
하루 대부분 블루베리 농장서 보내
농부로 살며 여유로움 생겨 만족감
농촌 현장·농민 얼굴 작품에 담아
초등학생들에게 사진 가르치기도
 

정주하씨는 전북 완주로 귀촌해 사진작가와 교수, 농민뿐 아니라 이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사진 속 인물은 다양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정씨. 완주=현진 기자


“농민은 자연과 사람을 이어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의 생명력’으로 작물을 키워내잖아요. 우리는 그걸 먹고 삶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작물을 재배하며 자연이 주는 위대함을 경험하고 싶어 이곳을 찾았습니다.”

정주하씨(58)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과 투박한 손을 카메라 속에 담아내는 사진작가다. 2011년부터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에서 살고 있다. 평일에는 집에서 차로 15분가량 떨어진 봉동읍 ‘백제예술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친다. 수업이 없을 땐 마늘·양파·감자·토마토가 자라고 있는 집 앞 텃밭에서 풀을 뽑는다. 최근엔 마을이장 자리까지 맡다보니 마을 어르신이 병원 갈 일 있다고 찾아오면 금세 하던 일을 멈추고 시내 나갈 채비를 하기도 한다.

“인천에서 태어나 전주와 익산 등 여러 지역에서 살아봤는데, 완주가 제 경험상 가장 한적한 동네예요. 농촌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보겠다는 오랜 꿈을 이루려고 인생 마지막 종착지로 삼은 셈이죠. 작은 텃밭에서 이웃과 함께 나눠 먹을 채소를 키워내는 것도 이젠 즐거움이 됐어요.”

정씨는 991㎡(300평) 블루베리 농장에서 하루 가운데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일하면서 블루베리 몇알씩 따먹곤 한다. 전부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때문에 안전에 문제는 없다. 블루베리 맛에 반한 주변 지인들은 농장을 넓혀 사업적으로 확대해보라고 성화지만, 정씨는 다른 일손을 쓰지 않고 혼자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유지할 생각이다.

“여기서 살며 가장 좋은 것은 제 삶도 자연 순리대로 따라가게 됐다는 거예요. 예컨대 5월말에는 가뭄이 자주 들어요. 땅이 쩍쩍 갈라지니까 농사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매년 발을 동동 굴렀죠. 그랬더니 동네 어르신이 찔레꽃 활짝 필 땐 원래 가뭄이 든다고 마음 놓으라고 일러주시더라고요. 이젠 찔레꽃 향이 진동할 땐 건조해질 걸 알고, 감 꽃잎 떨어질 땐 날이 선선해진다는 걸 알게 됐죠.” 도시에서 살 때처럼 다급해지지 않고 삶에 여유가 생겨 좋다고 했다.

덕분에 일찍부터 농업·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 구상에 몰입할 수 있었고 성과도 있었다. 그는 힘차게 자라는 작물과 함께 척박한 농촌 현장을 일궈가는 농민 얼굴을 담아 <땅의 소리>라는 작품집을 냈다. 서해 여러 양식장을 돌며 찍은 작품집 <서쪽 바다>에서도 정씨의 바다사랑이 물씬 풍긴다. 자연을 둘러싼 정겨운 삶의 현장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남겼다.

“마을 어르신들이 다 같이 제 전시회를 보러 서울 강남까지 버스를 타고 오신 적이 있어요. 밭일하는 모습만 보다보니 어르신들이 제가 사진가라는 걸 깜빡하신 거 같거든요. 제가 하는 일을 자랑스레 보여드릴 수 있어서 가슴이 뿌듯했죠.”

정씨가 처음부터 주민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민들이 볼 때 그는 연고도 없는 시골에 갑자기 들어온 외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민과 허물없이 지내려고 먼저 다가갔다. 한분 한분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가 ‘장수사진’을 찍어주며 말을 건넸다. 카메라 앞에 선 어르신들은 어색해했지만 멀끔한 모습을 남기고 싶다며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는 것은 물론 빗을 들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사비를 들여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선물했어요. 생각보다 더 호평을 받으며 다음부턴 빨리 친해질 수 있었죠. 그때 생긴 좋은 인상으로 지난해엔 마을이장에 선출됐고, 올핸 재선됐습니다. 마을 자치규약을 만들고 회의를 자주 열면서 주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정씨가 농촌에서 재능 기부를 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몇년 전 근처 가천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한달 동안 사진을 가르치기도 했다. 10명 남짓한 학생들은 사진기 작동 원리는 물론 상대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배웠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는 작은 도서관에서 학생들 각자가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도 열었다.

“앞으로도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앞장서 도전해볼 거예요. 본업인 작품 활동도 중요하지만 먹거리는 제가 스스로 준비한단 마음과 함께 주민을 위한 작은 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습니다. 주민 숫자가 줄면서 지역소멸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소외된 이웃에 관심을 두고 또 이들의 목소리도 활발하게 전하겠습니다.”

완주=서지민 기자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