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흔들리는 美의 ‘인권 원칙’

이민석 워싱턴 특파원 2022. 6.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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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회의를 마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8일 독일 뮌헨 국제공항에서 나토정상회의가 열리는 스페인으로 가기위해 에어 포스 원에 오르고 있다./로이터 뉴스1

“바이든 대통령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핵심 원칙으로 삼겠다고 약속한 것은 맞지만,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최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미국이 어떤 나라와는 인권 문제 때문에 안 만나고, 어떤 국가는 인권 문제가 있어도 만나는 건 이중 잣대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바이든 정권은 대외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인권과 민주주의가 있다고 강조해왔다. 이 원칙에 예외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이달 초 바이든 정부는 미 대륙 35국이 모이는 미주 정상회의를 개최하면서 중남미 대표적 반미(反美) 3국인 쿠바·니카라과·베네수엘라 정상을 초대 대상에서 뺐다. 이들 국가의 인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은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날 가능성이 크다. 빈 살만은 절대 왕권을 막는 왕족들은 물론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도 제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시절 그를 향해 ‘살인자’라고도 했다.

그런데도 최악의 인플레로 지지율이 고꾸라지자 사우디에 석유 증산을 ‘간청’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블링컨 장관은 “’가치’뿐만 아니라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급박한 현실 앞에서 원칙은 잠시 접어두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첫 공개 고백이었다. 그러면서도 “(카슈끄지 살해 사건에 대해) 용서나 망각을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같은 어정쩡한 말들이 여전히 백악관 안팎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바이든의 원칙이 현실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상황은 반복되고 있다. ‘탄소 제로’ 등 기후 환경 대응 원칙을 안보 분야에까지 적용한 바이든은 각종 규제들을 통해 국내 석유 생산에 제동을 걸었다. 러시아 때문에 석유 공급이 급감하자 ‘독재국’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끌어오려 물밑 대화를 시도했다가 민주당 내 반발이 일자 슬그머니 접었다. 환경 오염 때문에 여름철 판매가 금지돼 있는 고(高)에탄올 휘발유 판매를 한시 허용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유가 진정) 효과도 없고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당 내에서도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고유 가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인권·자유·민주주의 등의 가치는 바이든 행정부 초기 서방 및 인도·태평양 국가들이 뭉쳐 반중·반러 연대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임 트럼프의 ‘동맹 균열’ 시대와 달리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위상도 일부 되찾게 했다. 그러나 현실 앞에서 원칙들에 하나둘씩 ‘예외 조항’을 두며 물러서면 이런 성과들은 퇴색될 수밖에 없다. 국가 지도자의 원칙에 ‘조건’이 붙는 순간 국제사회에서 힘을 잃게 마련이다. 그 대가는 ‘고물가’ ‘고유가’보다 더 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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