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처음 해본다는 대통령에게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2022. 6. 2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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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 대통령실이 윤석열 대통령 첫 해외 방문에 동행하는 인원 전원에게 주의 사항이 담긴 행동 강령을 배포했다고 한다. 물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 대통령의 첫 해외 방문이니만큼 기강을 잡고 불미스러운 사고를 방지해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방문 당시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이 현지에서 여성 인턴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일어 순방 결과에 옴팡지게 찬물을 끼얹은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대통령의 첫 해외 방문 수행원들이 모두 긴장해서 실수 없이 맡은 바 일을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린 행동 강령이리라 믿는다. 그런데 정작 가장 긴장해서 움직여야 할 이는 다름 아닌 ‘대통령 처음 해본다’는 대통령 본인과, 배우자 프로그램을 통해 ‘전시 기획자의 커리어를 뽐내보겠다’는 의욕에 찬 부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유럽과 북미의 정상부인들과 왕실의 안주인들이 갖는 기본적인 문화적, 예술적 소양은 전시 기획자로 활동해왔다는 김건희 여사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그에 결코 못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꼭 기억해 줬으면 한다.

#대통령의 첫 해외 방문이 왜 굳이 우리와 직접 관련 없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냐고 물을 생각은 없다. 그 직전에 열린 G7 회의에 초대 못 받은 것도 아쉬울 뿐 따질 바는 못 된다. 나토 회의에 파트너로 참여하는 것이 대(對)중·러 관계에서 부채로 남을 것이란 우려도 어차피 차후의 문제이니 그냥 남겨놓자. 윤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정회원만 30국에 이르는 다국적 회의에서 ‘한 방’에 국제 무대에 데뷔하는 게 꽤 매력 있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매력적인 국제 무대가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는 또 하나 곤혹스러운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 나토 정상 회의 참석을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윤 대통령은 동행한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 (정상들) 얼굴이나 익히고 간단한 현안들이나 좀 서로 확인하고 다음에 다시 또 보자는 그런 정도 아니겠냐. (그러니) 특별한 마음가짐이 있겠나.” 이게 대통령 입에서 나온 얘기인가 싶을 만큼 내 귀를 의심했다. 솔직히 국제 무대를 너무 만만히 본 것이다. 국제 무대에서는 양자 회담일지라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바보가 된다. 하물며 정상이 수십 명 모여드는 다자간 회의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국제 무대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덩그러니 따로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적잖을 것이다. 아예 가지 않으면 모를까 시간과 돈 들여 간 것이면 그래도 뭔가 자리매김은 해야 하지 않겠나. ‘만나서 반갑다(Nice to meet you)’ 하고 ‘다음에 또 보자(See you again)’ 하며 돌아오겠다는 건가? 14시간 비행하는 동안 유로(EURO) 축구도 볼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다. 하지만 몽중일여(夢中一如), 꿈속에서도 분명한 핵심 화두를 놓치면 안 된다.

# 이미 보도된 바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행사를 최소 14건 소화한다고 한다. 나토 회원국과 파트너국이 함께 토의하는 자리에서 발언 시간은 3분을 할당받았다. 하지만 그 3분을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 극대화해서 활용하겠단 생각을 가져야 마땅하다. 중언부언하면 그 3분이 3초만도 못하지만, 잠자면서도, TV 보면서도, 책 보면서도 명확한 화두를 갖고 고민하면 그 3분의 발언을 통해 진짜 알찬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왜 북대서양과는 지정학적으로 무관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나토 회의에 참석했는지, 그와 동시에 대북, 대러, 대중의 지정학적 필연 고리 속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어떤 안보와 평화 구상을 갖고 있는지를 핵심적으로 언급할 수 있어야 한다. 회의 중간중간 아주 짧게 만나는 다른 정상들과도 막연히 원자력 세일즈 하고 북핵 저지 운운하겠다는 식으로만 할 것이 아니다. 원자력 세일즈는 오랜 시간 공들여 밑판을 깔아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팔려면 실무진 차원에서 다져놓을 일이 있고, 최고 지도자가 경제적 수준을 넘어서서 결정타를 때릴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 자존심 강한 프랑스가 김영삼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에 테제베(TGV) 고속철을 팔기 위해 당시 미테랑 대통령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방한한 것은 물론,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서 가져간 의궤 중 한 권을 직접 들고 오지 않았던가! 멀리 갈 것 없이 얼마 전 한미 정상회담 당시 바이든 대통령이 준비해온 선물을 보면 정상 간 회담이나 회의를 앞두고 상대를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윤 대통령에게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랜돌프 선글라스와 함께 윤 대통령이 몇 차례 언급한 트루먼 대통령의 명언 ‘The Buck Stops Here’(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를 백악관에서 자란 나무에 손으로 새긴 탁상 푯말을 건네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노회한 바이든은 윤 대통령에게 약 50조원에 가까운 이득을 챙겨 갔지만 말이다. 하물며 짧은 만남일수록 상대 정상이 순간 ‘아!’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 한둘 정도는 준비해야 하는 것이 국제 무대에 서는 대통령의 자세다.

# 윤 대통령이 나토 회의에 참석해 처음 만나기로 했지만 불발된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은 10년째 대통령 자리에 있는 이다. 비록 퇴임을 앞두고 있지만 자국 내 지지율이 90%에 이르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푸틴과 직접 얘기가 되는 거의 유일한 서방 측 정상이다. 이런 정상은 일정을 다시 조율해서라도 반드시 만나 푸틴에게 전할 나름의 핵심메시지 하나 정도는 던져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고민하고 관철하는 것이 국제무대에서 대통령이 할 일이다. 누구나 대통령 처음 하지 두 번 세 번 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그러니 치열하게 고뇌하고 좀 더 움직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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