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적폐 청산의 부메랑 효과
달콤한 복수의 계절이 돌아왔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보복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다. 케케묵은 진부한 정치적 프레임의 영원한 회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의 방향과 그 정책 담당자들이 바뀌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전 정부의 비리와 부패가 드러나면 사법체계 안에서 수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새로운 정권은 언제나 과거 정부를 부패 정권으로 낙인찍으면서 적폐 청산을 개혁의 도구로 삼으려는 반면, 과거 정권 세력은 이를 정치 보복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설령 법에 따라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적폐 청산’이라 하더라도 정파에 따라 ‘정치 보복’으로 읽히는 것이다.
새롭게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정치 보복을 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 보복’은 오히려 위기에 빠진 더불어민주당이 강한 야당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프레임처럼 들린다. 사실 ‘적폐 청산’이라는 말도 보수 정권보다는 문재인 진보 정권이 국정과제로 내세운 정치적 프레임이지 않은가? ‘이게 과연 나라인가?’라고 국가에 대한 총체적 의심을 제기했던 광화문 촛불집회의 여파로 적폐 청산은 한때 개혁 조치로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깨끗이 씻어버린다는 이 혁명적인 용어는 음험하고 폭력적이었다. 자신만이 옳다는 정치적 독선은 반대파를 경쟁자로 여기기보다는 처단하거나 제거할 대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독선과 독재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적폐 청산은 정치 보복으로 읽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정치 보복을 불러온다. 적폐 청산의 아이러니다.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가졌을 때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적이 거꾸로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적폐 청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당 정부가 적폐 청산을 합법적으로 투명하게 했다고 자부한다면, 진보 세력의 적폐에 대한 수사와 처리도 마찬가지로 투명하게 이루어지면 될 일이다. 2017년 이재명 의원이 한 말은 여전히 타당하다. “적폐와 불의를 청산하는 게 ‘정치 보복’이라면 그런 정치 보복은 맨날 해도 된다.”
적폐 청산은 언제나 정치보복 불러
그러나 적폐 청산은 언제나 정치 보복을 불러온다. 자신들이 하면 적폐 청산이고 다른 사람이 하면 정치 보복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은 동전의 양면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폐 청산이 실제로는 정치 보복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은 합법적인 적폐 청산도 정치 보복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정치 보복의 불행한 역사가 더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적폐 청산이 정치 보복으로 이어지고, 정치 보복이 합법성의 외관을 갖추기 위해 적폐 청산의 이름을 빌리는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 사실 공직 사회의 부패가 없고 정치 부문의 청렴도가 높다면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하는 국가별 부패인식지수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2021년 180개국 중 32위지만, 선진국 중에서는 하위권이다. 완전히 썩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썩은 나라에서 반부패 개혁을 추진하지 않고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청렴하고 공정한 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상대방을 썩은 자라고 낙인찍어 제거하는 사람도 이미 어느 정도는 썩었기 때문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적폐 청산은 언제나 정치 보복이 된다.
문제는 적폐 청산의 ‘정도’이다.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전 정부에 대한 수사가 장기화하면, 국민은 피로해지고 원래 의도했던 개혁은 결국 정치적 보복으로 탈바꿈한다. 전 정권에 대한 비리 캐기가 기획수사의 의심을 받을 정도로 과도하게 진행되면, 합법적 수사조차 정당성을 잃게 된다. 민주당이 ‘정치보복수사 대책특위’를 출범시킬 정도로 윤석열 정부의 수사가 과도한지는 의문이다.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수사가 강도 높게 진행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산업통상자원부 블랙리스트, 대장동과 백현동 특혜,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에 대한 검경 수사가 정치 보복이라면, 이 문제들을 그냥 덮어야 한다는 말인가? 민주당의 정치 보복 주장이 윤석열 정부의 부패 개혁을 저지하려는 정치적 책략이라면, 그것은 자칫 ‘보복’당할 만큼의 비리와 위법행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강화할 수도 있다.
적폐 청산과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협치’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협치를 위해서는 정치 보복이 우선 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보복을 끝내고 협력을 시작하려면, 누군가 ‘먼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합리적 인간의 복수 본능을 활용한 ‘팃포탯’(Tit for Tat) 전략을 제안한다. ‘팃포탯’은 상대방이 협력하면 마찬가지로 협력하고, 상대방이 공격하면 똑같이 공격하는 맞대응 전략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참호전을 벌이는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상대방에게 총을 쏘지 않는 비공격적 행위가 일어났다. 전쟁 상황에서 보복은 언제나 더 커다란 보복을 불러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온다. 보복은 적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적과 공유한 상황에서 “저 친구들은 나쁜 친구들이 아니야, 우리가 건드리지 않으면 쟤들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아”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병사들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나를 살리면 너도 살려줄게’라는 공존공영(live and let live)을 실천한 것이다.
최대 복수는 상대처럼 안 하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협력을 시작할 수 있는 ‘팃포탯’ 정책이다.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정당들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적들이 아니다. 집권여당은 국민의 뜻에 따라 언젠가 야당이 된다. 똑같이 보복한다는 의미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복수법은 인간의 본능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매우 공정한 것같이 들리지만, 이 원칙은 보복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정당성을 상실한다. 한 번의 모욕이 새로운 모욕으로 이어지고, 이에 대한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는 과정이 끝없이 반복된다. 처음 불화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은 까마득하게 잊히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보복행위만 기억된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처음 정치 보복을 했는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협력을 시작하는가이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상대를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면, 적폐 청산을 시도할 수 있다. 적폐 청산이 ‘진보 세력 20년 집권론’과 만나면, 정치 보복의 색깔은 훨씬 더 짙어진다. 제거되어야 할 대상과 협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정치적 상대를 경쟁자로 대하기보다는 위협적인 적대자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진영 논리로 초래된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는 상호 관용과 협치의 토대를 파괴했다. 윤석열 정권은 이를 반면교사 삼아 똑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치적 상대를 적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권력을 차지하는 경쟁자로 인정한다면, ‘팃포탯’ 전략은 협치를 시작할 수 있는 좋은 정책이다. 우선 윤석열 정권은 상대가 협력하는 한 거기에 맞춰 협력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부패 수사의 기간과 범위가 적절하고 예측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물론 상대가 협력보다는 도발과 갈등을 선택할 때는 이를 응징할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의회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이 협력보다 대립을 선택할 때, 윤석열 정부는 물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집권여당을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협력의 조건을 분명히 제시하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적폐 청산의 부메랑을 미리 막으려면, 우리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장 좋은 복수는 상대가 한 것처럼 똑같이 하지 않는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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