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미 낙태권 판결과 보수의 승리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단권(낙태권)을 합법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은 사건은 미국 보수주의 운동이 거둔 승리다. 이뿐 아니라 공공장소 권총 휴대 허용, 미란다 원칙 미고지 경찰관 피소 면제, 공립학교 미식축구 코치의 경기 후 공개 기도 허용 등 최근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들은 진보 진영이 쌓아온 결실을 허물고 있다. 이런 판결들은 대체로 미국 사회의 여론과도 배치된다. 대법원이 투표권, 동성결혼 등 다른 영역에서도 기존 권리와 자유를 침식하는 판결을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자유와 진보의 대명사 미국은 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 보수가 거둔 승리의 첫 번째 비결은 연대였다.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에 충격을 받은 사회적 보수주의 진영은 경제적 보수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보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엘리트 집단과 이들을 후원할 재력가, 운동가 및 정치가들이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했다.
두 번째는 집요함이다. 그들은 대법원 안과 밖을 공략했다. ‘싹수’가 보이는 보수 성향 법률가들을 양성해 사법부 변화를 꾀했다. 일례로 미국에서 대법관 충원 시기가 되면 자주 거론되는 법률가 단체가 있다. ‘페더럴리스트 소사이어티’다. 1982년 출범한 이 단체는 사법 보수화의 핵심으로 지목된다. 현직 보수 성향 대법관 대부분이 이 단체 회원이거나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밖에서는 보수 이데올로기에 배치되는 법과 제도를 겨냥한 소송을 끊임없이 제기함으로써 판례 변경에 한 발짝씩 다가갔다.
마지막은 뻔뻔함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보수 성향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별세하자 한 달 뒤인 3월 메릭 갈랜드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야당인 공화당은 그해 11월 선거에서 당선된 차기 대통령이 후임을 임명해야 한다고 버텨 갈랜드 임명을 무산시켰다. 대법관 구성에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마지막 해인 2020년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해 9월 진보 성향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별세한 것이다. 민주당은 공화당이 폈던 논리를 들어 대법관 임명을 반대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원내대표는 4년 전 자신이 했던 말이 회자되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인준을 밀어붙였다. 이번엔 대법관 공석을 신속히 채우는 것은 대통령 권한이자 의무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대법원을 보수 6명 대 진보 3명의 ‘보수 절대 우위’ 구도로 재편시키는 화룡점정이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대법원의 임신중단권 폐기 판결을 11월 중간선거에서 지지층을 결집시킬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한들 당장 대법원에 영향을 미칠 수단은 없다. 종신제인 대법원에서 보수 성향 대법관 6명 가운데 한 명이라도 물러나려면 최소 1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전망이 나온다. 진보 진영에서 대법관 종신제를 폐지하거나 대법관을 증원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공화당이 쉽게 찬성할 리 만무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진보 진영은 보수로부터 연대와 집요함, 뻔뻔함이라는 승리의 비결을 습득해 반전을 도모할 수 있을까?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삶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칠 물음이다.
김재중 워싱턴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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