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부터 은둔이 주는 '고요' 익숙.. 퇴직 후 비로소 참맛 알아"
등단 50주년.. 63편 모아 21번째 출간
고요 향한 근원적 갈망·통찰로 가득차
인생론적 탐색 등 담긴 '고요에 대하여'
이번 시집의 중심 테마를 상징하는 시
악기의 마음을 묘파한 시 '악기의 이유'
삶에 부드러움 채우기 위한 노력 담겨
이를 뒤에서 찬찬히 지켜본 그는, 연주가 모두 끝난 뒤 물었다. 왜 낙타 앞에서 마두금을 연주했느냐고, 도대체 무슨 곡을 연주했느냐고. 낙타 주인 이야기인즉슨 이러했다.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어미 낙타에게는 못된 버릇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 새끼를 알아보지 못해서 새끼가 젖을 빨려고 하면 뒷발로 걷어차거나 때리는 것이라고. 심지어 입으로 새끼를 물어뜯는 낙타도 있다고. 주인은 어미 낙타들에게 잃어버린 모성을 기억하게 해주기 위해 마두금을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거나 우주의 질서를 노래한 몽골의 전통 음악을. 어미 낙타들은 마두금 연주를 알아듣고서 눈물을 흘린 뒤 새끼가 젖을 빨아먹도록 다리를 벌려준다는 것이었다.
2000년 무렵부터 시인 정호승과 함께 몽골에 흠뻑 빠져 몽골을 자주 찾던 그는 낙타 주인 이야기를 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어릴 적 어머니를 잃으면서 격랑처럼 운명으로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이때의 경험과 기억은 켜켜이 쌓여 한편의 시가 됐다.
등단 50년을 맞은 이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신의 시를 어떻게 다시 혁신했을까. 그의 시 세계는 결국 어디로 가 닿을까. 이 시인을 지난 22일 서울 혜화역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11년 전 전화로 만났던 내용도 일부 녹였다.
시 ‘고요에 대하여’는 고요의 의미를 철학적이고 인생론적으로 탐색한 작품으로, 이번 시집의 중심 테마인 고요를 상징하는 시로 꼽힐 만하다. “어떤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어서 놓여나야겠다/ 고요가 도와주리// 자신의 정당함을/ 자꾸 입증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냥 고요하게/ 제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겠다//…나는 이 공간을/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다/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곳에 가서 고요를 찾았다”(‘고요에 대하여’ 부문)
―고요를 다룬 이 시는 언제 어떤 계기로 해서 쓰게 됐나.
“첫 돌을 맞기 전에 어머니를 잃은 뒤, 어머니가 세 번이나 바뀌면서 눈칫밥을 먹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어릴 때 어디 숨어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미군 전투식량을 담았던 커다란 ‘시레이션’ 박스 안에 들어가서 몸을 숨기거나, 구석진 다락방에 올라가서 숨어 있을 때, 가족들이 저를 어디 있는지 모를 때, 행복했다. 은둔이 주는 고요에 어릴 때부터 익숙해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가족에 노출되면 잔소리하고, 까탈과 폭풍 이런 것들이 있었으니까. 나중에 교수가 되고서도 시달리는 일상에 마음의 평화를 얻어 보겠다고 시골에 집도 샀지만 진정한 고요를 얻지 못했다. 2015년 퇴직을 하고 나서야 제 앞에 놓여 있는 시간을 마음껏 요리하게 되면서 비로소 고요의 참맛과 즐거움에 익숙해진 것 같다.”
악기의 마음을 묘파한 시 ‘악기의 이유’는 시인이 아코디언을 비롯해 여러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해왔기에 가능한 시일 것이다. “저 어부는/ 위험을 알고도 물속에 들어가네// 저 사냥꾼은/ 사자 코뿔소가 두려워도/ 들판에서 짐승 발자국 따라가네// 저 의로운 열사는/ 칼과 총의 숱한 위협 속에서도/ 죽음을 삶으로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네// 아, 불행이란/ 잠시 휘몰아친 광풍이며/ 행운은 우연에 의한 것일지니/ 아무리 큰 고난/ 휩싸인들 두려움 떨치고/ 마음 편히 가지려네// 내가 줄곧 북 치고/ 나팔 불며 손풍금 연주하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일세”(‘악기의 이유’ 전문)
―악기의 이유랄까, 존재 의미는 쉬이 생각하기 어려운데, 깜짝 놀랐다.
등단 50년을 맞았지만, 시인이자 평론가는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식민지 시대 알려지지 않은 가수 54명을 소개한 ‘한국 근대가수 열전’과 홍범도 장군의 논픽션 평전(가제 ‘나 홍범도’) 등 여러 권의 작품을 차례로 펴낼 예정. 마치 쓰러지기 전까지, 허덕지덕 앞으로 나아가는 나귀처럼.
그래서였을까. 지난 25일 저녁 서울 덕수궁 옆 한정식집에서 안도현 및 정호승 시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그가 부른 노래는 이 장터 저 장터 돌아다니는 장돌뱅이의 애환을 담은 옛 노래였다. 바로 시인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 허덕지덕 살아온 나귀 같은 삶의 노래….
“등 뒤 수레에/ 제 몸보다 더 큰 짐 싣고// 가파른 언덕길/ 아등바등 오르는 나귀 한 마리// 나귀의 입에선/ 열차화통처럼 허연 입김 뿜어져 나온다// 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형제들도 모두// 그렇게 살다가 갔다/ 나도 그렇게 허덕지덕 살았다”(‘나귀 한 마리’ 전문)
글·사진=김용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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