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나르시시즘: 건강한 자긍심 또는 병리학적 자애

한겨레 2022. 6. 2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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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언어탐방]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요정들이 찾아와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호수를 위로했다. 호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나는 그가 내 위로 얼굴을 비춰볼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가 없잖아요!"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그는 갈증을 식히려다 또 다른, 참으로 이상한 갈증을 느꼈다. 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이 기이한 그리움을 자아냈던 것이다. 그 모습을 실체로 알고 그것에 반해버렸다. 그는 자신을 경탄의 대상으로 만드는 그 모든 것에 경탄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갈망했으니, 칭찬하면서 스스로 칭찬받고, 바라면서 바람의 대상이 되었으며, 태우면서 동시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서 나르키소스를 묘사한 대목이다.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나르키소스를 연모했지만, 그는 모두를 무시했다. 그 가운데는 숲과 샘의 요정 에코도 있었다. 에코는 실연의 고통으로 잠들지 못했고 몸은 비참하게 말라갔다. 몸속의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 뼈와 목소리만 남았다. 그러다가 뼈는 돌로 변했고 목소리만 남았다. 나르키소스에게 무시당한 이들 중 하나가 하늘에 복수를 요청했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그 청을 듣고 나르키소스에게 덫을 놓았던 것이다.

이상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나르키소스 신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오비디우스는 처음에 이 미소년이 물에 비친 모습을 다른 사람으로 알고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넓은 바다도, 먼 길도, 산도, 성문 닫힌 성곽도 아니다. 약간의 물이 우리를 떼어놓고 있구나. 그대가 누구든 이리 나오라!” 그러다가 나르키소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묘사한다. “그는 바로 나야. 이제야 알겠어. 내 모습이 나를 속이지는 못하지.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거야. 내가 불을 지르고는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르키소스는 사태의 진실을 알고 나서도 자기애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외친다. “돌아서보라! 그러면 그대가 사랑하는 것도 없어지리라.” 수면에서 얼굴을 돌리기만 해도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건만, 나르키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더욱 집착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물 위에 파문을 일으켜 모습이 흐려지자 “어디로 도망치는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리하여 “마치 밀랍이 불에 녹아내리듯, 아침 서리가 햇살에 녹아내리듯” 그의 육신은 괴이한 사랑의 불길에 녹아내렸고, 에코가 그랬듯이 생명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 그의 원래 모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저승의 거처에 받아들여진 뒤에도, 스틱스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르키소스 신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끔찍함은 여기에 있다.

나르키소스 신화는 고대로부터 있어왔지만,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용어가 의학계와 심리학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처음에는 자기애 때문에 성도착적인 행위를 하는 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20세기 초에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널리 알리는데, 나르시시즘에서 성적 함의를 분리시키고 그런 성향을 영유아기 인간이 거치는 인격 발달 단계의 하나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그 시기 인간은 자신 안에서 세상이 시작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카렌 호나이는 나르시시즘을 ‘건강한 자긍심’에서 ‘병리학적 자애’에 이르기까지의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지난 100여년 동안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은 점차적으로 일상용어가 되어, 때로는 부정적으로 때로는 긍정적 의미로 쓰였다. 산업사회 시기에는 나르시시즘을 부정적으로, 20세기 말에서 지금까지 후기산업사회에서는 되도록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며, 자연이 풍성했던 고대에 곳곳에서 수면을 대할 수 있었듯이, 디지털 문명의 시대에는 어디에든 화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상심리학자 크레이그 맬킨은 나르시시즘의 스펙트럼에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과 태도’의 정도에 따라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위험한 나르시시즘’을 구분한다.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극단적 성향이 문제를 일으키며, 우리 주변에 그런 성향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현실적 문제다. 오스카 와일드가 각색했다는 나르키소스 신화의 ‘속편’은 이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한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요정들이 찾아와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호수를 위로했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슬프겠냐고. 그러자 호수는 이렇게 되물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이 의외의 말에 요정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수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호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나는 그가 내 위로 얼굴을 비춰볼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가 없잖아요!”

호수는 자기애를 향유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 자신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는 타자의 죽음을 자기애의 쾌락을 상실했다는 차원으로 흡수해버리는 잔인함마저 있다. 호수와 나르키소스의 눈에는 ‘자기만’ 존재했던 것이다. 타자는 나를 비춰주는 도구와 수단으로서만 그 존재 이유가 있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 적절한 나르시시즘 같은 표현들은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맬킨도 결국에는 “나르시시즘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태도를 이따금 활용하는 게 아니라, 마치 부적처럼 붙들고 늘어질 때다. 그 순간 나르시시즘은 우리를 장악하고 과대망상에 빠지게 만든다”고 인정한다. 바로 그 점이 해결할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에 관해서는 어마어마한 ‘과학적’ 주장, 정보, 지식이 쌓여 있다. 무엇이 나르시시즘인지 헷갈릴 정도다.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비과학적 알레고리이지만 적어도 핵심적인 것을 전달하고 있다. 첫째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도 나르시시즘은 이기주의와 다르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행위다. 이는 윤리적인 문제다. 전자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으니 함부로 무시하고 자기 존재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론적 문제다. 둘째, 나르시시스트에게 다른 사람들은 항상 ‘수단일 뿐’이다. 나르시시즘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변하든, 적어도 이 두가지 속성은 그 개념을 이해하는 기본 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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