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독창적인 말과 글이 어디 있으랴

최재봉 2022. 6. 2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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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의 탐문][최재봉의 탐문] _17 표절

표절의 역사는 유구하고 그 함정은 치명적이다. 과장하자면 문학사란 곧 표절의 역사라 할 수도 있다. 벨로의 사례는 표절이라는 대양에 첨가된 물 한방울이라고나 할까. 이름이 알려진 작가치고 표절 논란에 휘말리지 않은 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주미 벨로라는 신인 작가가 지난달 초 미국의 한 온라인 문학사이트에 흥미로운 글을 올렸다. ‘나는 데뷔 소설의 일부를 표절했다. 전말은 이러하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7월에 나올 예정이었으나 출판사에서 출간 취소 결정을 내린 자신의 데뷔작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소설에는 임신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나오는데, 임신 경험이 없었던 그가 다른 이의 글을 도용한 것. 벨로는 “글을 쓸 당시에는 우선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부분은 일단 빌려 오는 것이고 작품이 완성된 뒤 편집 단계에서 내 언어로 다시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문제는 이 솔직한 고백과 반성의 글 또한 표절이었다는 것! 문학사이트 편집자는 벨로가 표절의 역사를 서술한 대목과 몇몇 전문가의 언급을 역시 다른 글들에서 표절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 글을 하루 만에 사이트에서 내렸다.

표절의 역사는 유구하고 그 함정은 치명적이다. 과장하자면 문학사란 곧 표절의 역사라 할 수도 있다. 벨로의 사례는 표절이라는 대양에 첨가된 물 한방울이라고나 할까. 이름이 알려진 작가치고 표절 논란에 휘말리지 않은 이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은 1922년 잡지 <개벽>에 발표됐다. 오산학교 스승인 안서 김억의 추천이었다. 그 전해인 1921년에 김억이 펴낸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에는 예이츠의 시 ‘그는 하늘의 천을 원합니다’가 ‘꿈’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소개됐다. 가난한 화자가 하늘의 천 대신 자신의 꿈을 그대의 발아래에 펼쳐 놓을 테니 그 꿈을 사뿐히 밟으시라(tread softly)는 것이 시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소월의 ‘진달래꽃’ 중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가 바로 이 시 속 “나의 생각 가득한 꿈 위를/ 그대여, 가만히 밟고 지나라”라는 대목을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수록작인 ‘불운’은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장시 ‘어느 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를 표절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따로 설명하기보다는 문제가 된 대목을 비교해서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사태는 분명해질 것이다.

“수많은 보석들이 잠자고 있다./ 어둠과 망각 속에 파묻혀,/ (…) / 수많은 꽃들이 아쉬움 가득,/ 깊은 적막 속에서,/ 비밀처럼 달콤한 향기 풍긴다.”(‘불운’ 후반부)

“수많은 보석들이 가장 순결하고 정갈하게/ 난바다의 깊고 헤아릴 수 없는 심연에 누워 있고,/ 수많은 꽃들이 눈에 띄지 않게 피어/ 인적 없는 황야의 대기에 그 아름다움을 헛되이 낭비하려고 태어났다.”(‘어느 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 14연)

작고한 불문학자이자 평론가인 황현산은 그럼에도 ‘불운’을 표절작으로 보는 데에 반대한다. “이 정형시의 시대에 보들레르가 영어와 프랑스어의 담을 넘으면서 깨어진 시구의 리듬과 각운을 프랑스어로 새로 만들어야 했던 노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황현산의 이런 주장은 2015년 6월 <경향신문>에 칼럼으로 실렸는데, 이 칼럼에는 보들레르와 그레이 말고도 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와 폴 엘뤼아르 시 ‘자유’에 관한 언급도 있었다.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 / 자유여”(‘자유’)와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타는 목마름으로’)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은 분명하지만, 시대 상황과 두 작품의 색깔 차이 때문에 이 역시 표절로 단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황현산의 칼럼이 발표된 때는 신경숙 표절 논란으로 문단 안팎이 시끄러울 무렵이었다. 신경숙의 남편인 평론가 남진우는 그해 말과 이듬해에 걸쳐 문예지들에 표절에 관한 글을 여러 편 발표한다. 아내의 표절을 두둔하고 나선 것으로 비치며 논란이 됐지만, 그의 지적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정보와 통찰을 담고 있었다. <현대시학> 2015년 11월호에 권두시론으로 쓴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에서 앞서 언급한 보들레르와 그레이의 사례를 상세히 분석한 게 대표적이다. 특히 말미에 인용한 <노턴 영문학 개관> 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전세계 영문학도들의 교과서라 할 이 책은 ‘어느 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를 그레이의 대표작으로 꼽으면서 “그 시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이 다른 사람의 시에서 빌려 온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한다. 이런 회심의 카드를 내보인 뒤, 남진우가 표절을 다룬 일련의 글들로써 하고자 하는 말이 비로소 등장한다.

“원천에 대한 추적은 또 다른 원천에 대한 추적을 낳고, 기원은 기원의 기원 속으로, 기원의 기원은 기원의 기원의 기원 속으로 점점 더 멀어져 간다. (…) 표절은 표절이다. 그러나 표절은 문학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 그것도 시작의 시작에 불과하다. 창조의 낙원 속에 이미 모방, 영향이, 표절이 뱀처럼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남진우의 주장을 아전인수 격 궤변으로 치부하지 말 일이다. 문학작품을 독창적이며 순수한 창작물로 보는 견해는 낡은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문호 셰익스피어는 수많은 역사 자료와 타인들의 저작물을 자유롭게 가져다 쓴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으로 치면 심각한 표절 사건이 여럿 벌어졌을 것이다.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 <황무지>의 작가 엘리엇은 “미숙한 시인은 흉내를 내고 노련한 시인은 훔친다”라는 유명한 말로 표절을 옹호한 바 있다.

1959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앙드레 슈바르츠바르의 <마지막 의인>의 10여줄은 고대 유대교 연대기의 문장을 베낀 것으로 드러나 표절 논란에 휘말렸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작가 편에 서서 이 사태를 개탄하며 이렇게 썼다. “어떤 문장은 결국 그의 것으로 여기고야 말 정도로 머릿속에 들러붙는다.” 이 일화는 프랑스 문학연구가 엘렌 모렐앵다르의 책 <표절에 관하여>에 소개됐는데, 이 책에는 표절에 관한 우리의 강박관념을 깨뜨리는 유명인들의 발언이 여럿 인용돼 있다. “고아처럼 오로지 하나뿐인 책, 다른 그 어떤 책의 후손도 아닌 책이 과연 존재할까?”(카를로스 푸엔테스), “그 어떤 텍스트이건 모두 과거의 인용문들의 새로운 직조물이다.”(롤랑 바르트) 등등.

표절은 물론 나쁜 짓이다. 표절은 원저작자의 영감과 노동의 결과물을 훔치는 도둑질이며 독자를 속이는 기만행위이기도 하다. 스위스 작가 장자크 피슈테르의 소설 <편집된 죽음>(원제는 ‘별쇄본’)은, 비록 원한과 복수심에서 비롯된 음모라고는 해도, 표절이 초래할 수 있는 파괴적 결과를 섬뜩하게 그려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표절을 적발하고 단죄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아니 애초에 그것이 타당하거나 가능한 일일까. 푸엔테스와 바르트 등의 주장에서 보다시피 완벽하게 독창적인 말이나 글은 가능하지 않다. 바둑을 두고 글을 쓰는 인공지능의 사례를 생각해 보자. 그들의 깜짝 놀랄 만한 성취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이른바 ‘딥 러닝’인데, 기보와 문장을 최대한 많이 입력하는 것이 딥 러닝의 기본이다. 그러니 일견 고유해 보이는 인공지능의 묘수와 작문이란 기존의 행마와 글쓰기의 흉내이며 변주일 뿐이다.

문장 차원만이 아니다. 소재와 주제의 표절에 관한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되는데, 이 역시 문장 표절과 마찬가지로 매우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런 시를 보라.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고향을 표절하고 엄니의 슬픔과 아부지의 한숨과 동생의 좌절을 표절했네 바다와 강과 저수지와 갯벌을 표절하고 구름과 눈과 비와 나무와 새와 바람과 별과 달을 표절했네(…)”(이재무 ‘나는 표절 시인이었네’ 부분)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는 모두가 모두를 베끼는 ‘표절 천국’에 관한 상상이 나온다. 이 작품의 배경인 상상의 땅 틀뢴에서는 “저자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책은 매우 드물다. 그들에게는 표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작품은 단 한 작가의 작품이며, 무시간적이고 익명이라는 생각이 확립돼 있다.”

보르헤스의 상상은 미래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저작권에 반대하는 카피레프트의 이념 그리고 인공지능 글쓰기의 발달이 그런 전망에 개연성을 더한다. 남진우의 글들은 그런 점에서 표절에 관한 진지한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 사건으로부터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났으니 이제라도 표절에 관한 차분하고 합리적인 토론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재봉 | 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지구를 위한 비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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