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의 색깔을 버려라[VNL] [발리볼 비키니]
황규인 기자 2022. 6. 28. 11:50
※칼럼을 시작하기 전 이번 ‘발리볼 비키니’는 배구 전문지 ‘더 스파이크’ 7월호 기사 ‘한국만의 색깔을 찾아라[VNL]’와 전혀 무관함을 밝힙니다.
2022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 참가한 거의 모든 팀이 엇비슷한 배구를 합니다. 한국만 예외입니다.
이런 현실과 무관하게 한국 배구 지도자 사이에서는 ‘아시아 배구 스타일의 정교함을 바탕으로 한 빠르기의 배구’를 한 것인지 아니면 ‘빠르기를 갖춘 높이와 파워를 앞세우는 배구’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두 배구 스타일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면 제 e메일(kini@donga.com)로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확실한 건 한국 배구계에는 이렇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대부분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릅니다.
서브를 보고 리시브라고 하는 사람은 서브가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리시브도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지난번 발리볼 비키니 (https://bit.ly/3A9Cidk)에 ‘숨은그림찾기’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눈이 밝은 독자분께서 찾아주실 거라고 믿었는데 역시나 이런 e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기사에 나온 움짤(GIF) 가운데 이선우가 때린 공은 시간차가 아닙니다. 이선우가 네트 쪽으로 뛰어 들어야 시간차입니다.’
지난번 칼럼에 넣었던 GIF를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독자님 설명이 맞습니다.
정호영(21·KGC인삼공사)이 상대 블로커를 결제하는 차원에서 트릭 점프를 뛴 건 맞지만 이선우(20·KGC인삼공사)는 그냥 직선으로 달려들어서 공격했습니다.
한국배구연맹(KOVO) 공식 기록원(KOVIS)이었다면 이 플레이는 그냥 (한국에서만 쓰는 용어인) ‘퀵오픈’으로 기록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2019년 3월 5일 남자부 안산 경기에서 나온 아래 플레이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 경기를 중계한 강준형 KBSN 아나운서 콜은 ‘시간차’, 한국배구연맹(KOVO) 공식 기록원(KOVIS) 판단은 ‘이동’이었습니다.
사실 강 아나운서도 먼저 시간차라고 정의한 뒤 삼성화재 손태훈(29)이 움직이면서 공격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혹시 손태훈 포지션이 ‘센터’라서 시간차가 아니라 이동 공격이 된 건 아닐까요?
그럼 아래 GIF에서 삼성화재 ‘레프트’ 송희채(30·현 우리카드)가 같은 해 1월 8일 대전 안방 경기에서 성공한 이 공격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이번에도 물론 KOVIS 판단은 ‘이동’이었습니다.
손태훈은 몰라도 이 송희채가 구사한 이 공격 스타일은 배구 팬들이 흔히 이동 공격이라고 부르는 형태와 아주 다릅니다.
보통은 센터가 코트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뛰어간 뒤 한 발로 점프해 스파이크를 날리는 걸 이동 공격이라고 부르니까요.
아래 GIF에서 이다현(21·현대건설)이 보여주고 있는 바로 이 스타일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서로 스타일이 다른데 한국에서는 전부 이동 공격입니다.
한국 중계방송에서도 A 속공과 B 속공을 구분하고, 파이프와 소위 ‘라이트 백어택’을 나누지만 KOVO는 그저 △오픈 △속공 △퀵오픈 △시간차 △이동 △후위 등 여섯 가지 형태로만 공격 유형을 기록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배구 팬들 머리속 공격 유형도 이 분류를 따라갑니다.
반면 해외에서는 송희채 케이스는 플레어(flare), 이다현 케이스는 슬라이드(slide)로 구분합니다.
어떤 대상을 얼마나 자세히 나누는지는 세상을 보는 우리 인식을 바꿔 놓습니다.
위에 나온 쇠고기 분위 분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1901~1978)에 따르면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쇠고기를 가장 세분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배구 전문 팟캐스트 ‘차돌배구 쇼’를 듣는 것과 동시에 ‘차돌박이’도 먹을 수 있습니다.
반면 미국에는 양지(brisket)까지만 있을 뿐 양지 가운데 차돌박이에 해당하는 부위를 특정하는 표현은 없습니다.
당연히 미국산 쇠고기에도 차돌박이에 해당하는 부위가 있지만 정확하게 똑같은 의미로 쓰는 영어 표현은 없는 겁니다.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이에 대해 “대상이 언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에 선행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배구 용어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위에 있는 그림은 미국 여자 배구 대표팀에서 활용하는 공격 종류입니다.
미국배구협회는 이 중 노란색으로 칠한 용어는 외워두고 있어야 한다고 선수들에게 주문합니다.
이렇게 따로 표시한 것만 세어도 13가지로 KOVO 기준보다 두 배 이상 많습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시도하는 공격은 ‘템포’ 단위로 이를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코트 왼쪽에서 구사하는 Go - Hut - 4는 뒤로 갈수록 세터가 느리게 공을 띄우는 공격 형태를 뜻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다면 지난번 발리볼 비키니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https://bit.ly/3A9Cidk)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면 한국에 이런 공격을 구사하는 팀이 전혀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적어도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공격을 구분하는 ‘문화’가 한국에는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김춘수 시인(1922~2004)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의 몸짓’이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될 수 있도록 ‘이름’을 찾아주자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양지가 아니라 차돌박이를 먹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잠깐 농구 코트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겠습니다.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 주장 이대성(32·한국가스공사)은 한국 농구계에서 보기 드문 ‘미국 유학파’입니다.
미국 하와이 브리검영대로 유학을 다녀왔고 프로 입단 이후에도 미국프로농구(NBA) 하위 리그인 G리그 무대에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대학에 입학하려면 120점 만점인 토플 점수가 60점 이상이어야 했는데 알파벳밖에 모르던 상태에서 반년 만에 82점까지 올린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
이대성은 유튜브 채널 ‘매거진농구인생’에 출연해 “인식의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최대치 가치를 두는 부분이 있잖아요.
우리나라 농구 하는 사람들은 속이는 농구가 최고라고 가치를 둬요. 이쪽으로 보고 저쪽으로 패스하고, 내가 오른쪽으로 가는 척하면서 왼쪽으로 가고.
제가 미국에서 배운 농구의 최고 레벨은 내가 왼쪽으로만 가는데 왼쪽을 뚫어야 되고, 이 수비자가 내가 슛을 쏘는 걸 아는데 못 막는 거예요.
이게 농구의 가장 궁극적인 최고 레벨이에요. 이게 정립이 되어야 슈퍼스타가 나오고 천재가 나와요.
(그런데 우리는) 더 밑의 레벨을 최고라고 알고 있어서 위로 못 올라가는 거죠. 그래서 이런 교육적인 시스템이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배구는 다른가요? 한국 배구계는 정말 최고 레벨이 배구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나요? 그리고 그리로 올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나요?
이대성이 이야기한 것처럼 최고 레벨에 오르려면 인식을 바꿔야 하고 인식을 바꾸려면 용어부터 바꿔야 합니다.
소 앞가슴과 배에 붙어 있는 고기를 뭉뚱그려서 ‘양지’라고 부르면 절대 고소하고 쫄깃한 ‘차돌박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 배구에서 세터가 거의 수평으로 공격수에게 공을 보내는 ‘슛(shoot)’을 보기 힘든 건 ‘퀵오픈’이라는 콩글리시에 이런 시도를 전부 가둬놓기 때문은 아닐까요?
또 있습니다. 저도 이 칼럼에서 센터, 레프트, 라이트 같은 표현으로 선수 포지션을 지칭했지만 실제로 각 선수가 이 자리에서만 플레이하는 건 아닙니다.
미들 블로커, 아웃사이드 히터, 아포짓처럼 플레이 특성에 따라 포지션을 나누는 게 맞습니다.
또 한국 배구 팬이 흔히 아는 A, B, 백A, 백B 형태로 속공을 나누는 나라도 한국과 (실력과 무관하게 배구가 국기인) 네팔 정도밖에 없습니다.
언어가 국내용이면 세계관도 국내용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지금 한국 배구에 중요한 건 ‘한국만의 색깔’을 찾는 게 아닙니다.
한국 배구는 오히려 너무 ‘한국만의 색깔’을 고집하다가 세계 배구와 멀어진 겁니다.
세계 배구를 어떻게 수입해서 그 언어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아니면 네팔처럼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가 않어’ 모드로 우리끼리 배구 비슷한 놀이를 하고 노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 배구 스타일의 정교함을 바탕으로 한 빠르기의 배구’도 ‘빠르기를 갖춘 높이와 파워를 앞세우는 배구’도 모두 한국 배구를 못 바꿉니다.
행동을 바꾸는 건 이렇게 거창하고 현란한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용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차돌배구 쇼도 많이 구독해 주시고 (N 포털에서 보고 계신다면) 제 이름 옆에 구독 버튼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학부에서 언어학 전공했다고 소쉬르 이름까지 들먹이며 잘난 척해 본 ‘발리볼 비키니’였습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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