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의 산 이야기] 풍경 팔아 일확천금 얻은 미국판 봉이 김선달 루돌프 하겐

글 신영철 산악문학가 사진 정임수 시인 2022. 6. 28.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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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북쪽 2시간 거리의 레드록 캐니언 주립공원Red Rock Canyon State Park
컬러풀한 지층이 켜켜이 쌓여, 연대기를 보여 주고 있는 레드클리프 전경. 영겁의 시간 동안 수많은 침식과 융기, 바람이 자연의 걸작품을 만들었다.
사막은 단조로운 땅. 누런 색감의 모하비사막을 직선으로 가르며 달리는 14번 고속도로. 삭막한 주변 배경이 시나브로 붉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누가 설명하지 않지만 대지의 표정으로 레드록Red Rock 주립공원이 가까워 진 것을 알 수 있다.
붉은 바위 레드록 공원은 매우 특이한 지층의 집합체. 이 독특한 표정 때문에 다양한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미이라> <쥬라기공원>뿐 아니라 TV 시리즈 <에어울프>도 이곳의 기묘한 지층을 배경으로 삼았다. 당연히 전문 사진가들에게는 황금어장. 수만년 융기와 바람과 물에 깎인 독특한 지형은, 총천연색 조각들의 거대한 야외전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14번 도로와 헤어진 레드록 공원도로는 한가했다. 입구에 들어서며 벌써 붉은 사암砂巖들이 시야를 압도한다. 리카르도 야영장Ricardo Campground에 텐트를 세웠다. 공원 안에 있는 50개의 캠핑 공간은 선착순으로 제공되는 곳. 비용은 차량당 25달러. 전기나 샤워 시설은 없으며 푸세식 변소만 있는 원시적 형태의 야영장이다.
회색빛 주름과 붉게 솟은 돌기둥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캠핑 공간은 넓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 떠질 정도로 멋진 사암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입구의 붉은색과는 다르게 회색빛 바위 탑이 캠프장에 접근하는 도로를 따라 늘어선 곳. 이 공원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바닥에서 튀어나와 기둥처럼 우뚝 솟은 절벽들일 것이다.
이곳에 텐트를 세우니 다른 행성에서 캠핑하는 느낌이 물씬 든다. 밤이 오고 별들이 돋기 시작했다. 우리도 미리 준비해 온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이 공원의 밤은 또 다른 마법의 시간이라는 정보는 맞다. 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망원경을 세워놓고 야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인근에 도시가 없기 때문에 사막공원의 밤하늘은 불빛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구역. 눈에 익은 북두칠성이 반갑게 하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은하수가 저렇게 밝았던가? 묘하게 솟은 사암들이 별빛을 받아, 습자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희붐한 풍경도 색달랐다.
낙타바위라 불리는 붉은 돌출 사암. 역시 바람과 침식이 만든 작품이다.
컬러풀한 바위나라! 하겐 트레일
신 새벽, 폭력적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 서둘렀다. ‘금강산도 식후경’은 이곳에선 맞지 않는 말. ‘금강산도 식전’으로 바꿔 불러야 할 만큼 사막산행은 끔찍하다. 그늘 한 점 없는 사막 트레킹은 자신 없다. 경험으로 그걸 안다.
아침도 거르고 나선 첫 번째 목표는 하겐 트레일Hagen Canyon Nature Trail. 고도 변화가 거의 없는 3km 정도의 원점회귀 하이킹. 물론 더 이어나가 길게 잡을 수도 있다. 트레일에 들어서자 일출이 시작된다. 새벽 붉은 절벽과 돌기둥, 장엄한 암석군이 깨어나고 있다. 독특한 모양의 사암과 생생한 컬러의 바위나라가 일출과 함께 기지개를 펴고 있다. 붉은 색깔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한 가지 색깔이 아니다. 말 그대로 총천연색.
할리우드 서부 영화의 단골 배경으로 등장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무지개 색깔로 물든 사암 때문. 이곳은 엘패소산맥에 속해 있으며, 시에라산맥 최남단에 위치한다는 게 지정학적 분석. 1890년대의 금광 열풍으로 인해 사막의 변방 모든 협곡이 탐사되었을 때, 이곳이 발견되었다.
신전의 기둥처럼 침식된 사암 기둥들이 열 지어 서있다.
루돌프 하겐Rudolph Hage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확천금의 꿈을 좇아 이곳으로 온 사람. 그는 광산을 개발하려 거의 공짜였던 이곳 불모의 땅을 구입했다. 하지만 일확천금의 꿈을 가져다줄 금은 나오지 않았다. 역설같이 들리겠지만 그래서 ‘성공’했다. 파내면 없어질 금 대신 대를 이어 평생 팔아먹을 ‘붉은 관광지’를 얻은 것이다.
관광업자로 변신한 하겐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받았다. 그들을 안내하며 레드록에 기발한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사진작가 등 예술가가 많았다. 입장료도 받고 이름도 얻는 봉이 김선달 식 마케팅은 성공했다.
이 지역의 독특한 풍경이 널리 알려지자 이제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나섰다. 후대를 위해 보호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자연이라는 판정. 공원을 만들려는 주 정부에 하겐은 땅을 비싸게 팔았다. 결국 일확천금 꿈을 이룬 하겐은 우리가 걷는 트레일에 이름만 남긴 채 떠났다.
햇볕을 피해 이른 새벽 트레킹에 나섰다. 미로 찾기와 비슷한 사막 트레킹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마법의 고요한 바위도시
레드록 캐니언의 기묘한 색깔로 만들어진 바위들은 나름의 이름까지도 거대하다. 관악산 바위에 붙여진 고래바위 같은 작은 동물 이름이 아니다. 신성한 풍경을 묘사하는 작명들. 레이디 페어 스핑크스Lady Fair Sphinx, 타이 샨 사원Tai Shan Temple. 바위를 형용하는 작명은 이것들의 규모와 주요 볼거리라는 걸 상징한다.
마법의 고요한 도시Magic Silent City로 명명된 거대한 바위 앞에 섰다. 무음, 즉 소리가 없는 도시都市라. 당연히 바위로 만든 빈 도시에 소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정교하게 다듬어진 고요한 도시는 내게 말을 건네고 있다. 묵언 속에서 슬그머니 생각을 꺼내게 만드는 조각도시라니.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회색의 열주列柱가 솟은 신성의 구조물도 만났다. 회색 열주가 받치고 있는 붉은 색깔의 암석지붕. 정교한 조각가가 표현하려 해도 불가능했을 거대하면서도 미세한 조각품 순례. 자연이라는 예술가는 과연 위대하다.
레드록 캐니언 주립공원의 유일한 야영 장소인 리카르도 캠핑장. 야외 조각전시장 같은 풍경의 가운데 있다.
바위도시가 일출에 깨어나며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침묵은 집중한 것에 대한 상상에 도움을 준다. 상상과 공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사일런트, 말없음 아닌가. 이런 형이상학적 자연 구조물을 앞에 둔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이건 뭐지? 순례 중 눈앞에 펼쳐지는 컬러풀한 기묘한 세상은 그저 놀람이다. 레드록은 듣던 것보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붉었다. 이제 생각도 붉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곳은 이집트 룩소르 신전을 닮았고, 어느 바위는 그리스 파르테논 코린트식 신전이다. 건축에 대해 아는 상식을 동원해 보지만 거기까지.
그나저나 자연이 원래 이렇게 곡선이었던가? 자세히 보면 지붕도 열주도 각角이 진 직선이 드물다. 딱딱함보다 부드러운 흘림선이 주종을 이룬다. 비와 바람이 만든 조각이기에 그럴 것. 슬며시 미소가 나온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닮은꼴도 만났기 때문.
‘침묵의 도시’라 불리는 붉은 사암은 그리스 신전을 닮았다.
살바도르 달리 그림 닮은 조각
100년 전인, 1921년 이 계곡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여기를 ‘기적의 미로’로 소개했다. 그 신문은 자연 사진 공모전을 열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공개된 레드록의 ‘황홀한 사진’이 1등. 사진을 본 심사위원들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며, ‘레드록에서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극찬했다.
벽기둥과 열주. 크기만 다를 뿐 기둥과 기둥이 있되, 하나도 똑같은 기둥은 없다. 복도, 난간, 사원, 성, 대성당, 탑, 돔, 첨탑, 오벨리스크, 스핑크스, 완벽하게 조각된 자연의 선물. 아크로폴리스처럼 정교하게 장식된 채 묻힌 도시. 작고 거대한 층층 건물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구조물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이 빚은 레드록의 조각에 대해, 그때의 LA타임스는 감동을 부추긴다. 조각 앞에서 거기에 붙은 이름이 주는 영감靈感과 함께 감상하라는 것. 흉내를 내보니 어떻게 사람들이 감동했는지 이해가 된다. 지금도 레드록은 그런 서사를 이어가는 중이다. 자연 침식은 계속되는 진행형이니까. 침묵의 탑, 묘비 유적, 로열 게이트웨이, 리버티 돔, 그리핀 웅덩이, 묻힌 도시, 태양의 신전, 용암 소용돌이…….
회색빛 사암은 주름 기둥뿐 아니라 많은 자연동굴도 가지고 있다.
밥 먹기 전 하겐 트레일과 레드록 트레일을 모두 걸었다. 이미 태양은 떠올랐으나 아직은 폭력으로 바뀌기 전이다. 둘 다 볼거리가 많고 호기심 많은 등산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원점회귀 산행. 하겐 트레일 가파른 언덕을 기어올라 만난 낙타 바위와 '창'은 압권이었다. 채색된 바위가 커튼처럼 접혀 늘어지고 모여 있는 붉은 협곡. 레드록에서 자연이 조각한 명품들과 사진작가들이 붙인 이름은 서로 상상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색과 빛의 마술로 탐승객과 사진작가들을 유혹하는 레드록. 포토그래피Photography 어원이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데 동의한다.
레드록 트레일을 걷는 것은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일도 되었다. 폐허가 된 도시, 묻혀 있는 사원을 순례한다는 상상 속의 발품. 거대한 커튼의 주름을 꼭 빼닮은 바위 앞에 섰다. 문득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떠오른다. 시계가 녹아 흐르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실을 뛰어 넘었던 화가이자 조각가 달리. 뜬금없이 그를 떠올린 건 레드록 전체가 초현실주의 예술품을 보는 느낌이었기 때문.
늘어지고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기둥들이 모인 곳. 달리의 초현실적 그림을 빼닮았다. 절벽의 붉은색은 산화철 때문이라는 과학적 분석은 건조한 해석이다. 인간의 창작도 위대하지만 자연의 창조야말로 불가사의한 일.
거대한 극장 커튼처럼 주름진 절벽 아래 조성된 캠프 그라운드가 이색적이다.
레드록 사막의 열린 공간은 사실 아름다웠다. 사막은 상식대로가 아니었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가시 많은 식물과 꽃. 그리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는 야생 동물. 그런 것과 만나면서 ‘자세히 보면 예쁘다’라는 시구詩句가 떠오른다.
레드록 캐니언 주립공원에서 우리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 레드록 사막 캠핑과, 사막 하이킹은 모르는 걸 알게 해준 도서관이었으니까. LA에서 북쪽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레드록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곳이다. 원고를 정리하며 다시 든 느낌. 레드록 캐니언은 사막 하이킹과 캠핑을 위해 오아시스처럼 숨겨 놓은 보석이었다.

월간산 2022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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