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 이야기] 캘리포니아 명칭이 처음 쓰인 16세기 지도

글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고문 2022. 6. 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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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웅의 고지도 이야기 118
16세기 초의 아메리카 신대륙 지도(출처: Library of Congress).
이탈리아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2세가 계획한 서인도 탐험항해에 참가해 1497~1502년까지 2회에 걸쳐 카리브해 연안과 브라질 북쪽 해안을 탐험한 뒤 후원자인 메디치가의 로렌조 디 피에르프란체스코Lorenzo di Pierfrancesco에게 보낸 서신에서 콜럼버스가 발견한 땅을 ‘신세계Nuovo Mundo’라고 썼다.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인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는 <세계지 입문Cosmographiae Introductio>을 출판할 때 부록인 세계지도에 신대륙을 표시하면서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서 ‘America’라고 표기했다.
‘신세계’에 대한 지도는 그 뒤 1529년 포르투갈의 지도제작자 디에고 리베이로Diogo Ribeiro와 1540년 독일의 지도학자 제바스티안 뮌스터Sebastian Münster에 의해 제작된 이후 1562년 스페인의 지도제작자 디에고 구티에레스Diego Gutiérrez와 플랑드르 판화가 히에로니무스 콕Hieronymus Cock이 공동으로 당시 제4의 대륙이라 불리는 아메리카대륙, 즉 신세계에 관한 크고 화려한 지도를 제작했다.
“신세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
이 지도는 현재 미의회도서관과 대영도서관에 각 1점씩 소장되어 있는데, 미의회도서관 본은 독일의 작센-코부르크Sachsen-Koburg공국의 고타 공작Duke of Gotha의 소장품이었다가, 1932년 뮌헨에서 열린 경매에서 미국 서적상에게 낙찰된 뒤 사업가이며 희귀본 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레싱 J. 로젠월드Lessing J. Rosenwald에게 매각되었다. 1949년 그의 수집품 일부가 미의회도서관에 기증될 때 이 지도도 포함되었다.

구티에레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스페인의 우주지학자 겸 통상원Casa de la Contratación의 지도제작자인 아버지가 1554년에 사망하자 왕실의 명에 의해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해 통상원에서 지도제작과 항해 정보를 담당하다가 1574년에 사망했다. 한편 히에로니무스 콕은 플랑드르 앤트워프Antwerp의 화가이자 판화 인쇄업자이었는데, 구티에레스가 자신의 지도제작을 콕에게 맡긴 이유는 스페인의 판화가는 세밀한 지도를 조각할 만큼 숙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지도의 크기는 가로 86cm, 세로 93cm로, 워낙 커서 가로 2등분, 세로 3등분 6장을 접합해 한 장으로 만든 것이고, 지도의 축척은 약 1:17,500.000이다.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지도였으나, 지리적이나 항해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장식용이나 외교용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영도서관 본은 사방에 폭 4mm의 아름다운 장식 테두리가 있으나, 미의회도서관 본은 위아래에만 테두리가 있고 좌우에는 없어 여러 가지 추측을 자아내고 있다.

지도 상단에는 라틴어로 ‘Americae Sive Quartae Orbis Partis Nova Et Exactissima Descriptio’, 즉 ‘아메리카와 신세계에 대한 새롭고 가장 정확한 묘사’라는 제목이 있고, 끝에는 제작자 두 명의 이름과 제작 연도가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 그려진 범위는 경위도좌표로 북위 57°와 남위 70° 사이, 동경 14°와 서경 245° 사이의 지역이고, 지리적으로 아메리카대륙의 북미 남동부와 중남미 전 지역, 그리고 남극 일부가 표현되고, 유럽과 아프리카대륙은 서쪽 일부만 표현되어 있다. 지도 중앙에 가로지른 굵은 선은 적도로, 눈금은 1° 단위의 경도를 나타낸다. 당시 본초자오선은 아프리카대륙의 최서단인 베르데곶Cabo Verde을 지나는 자오선이었다.

지도는 먹 단색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역동적이다. 바다의 높게 일렁이는 파도는 선의 강약과 음양으로 실감나게 입체감을 표현했고, 곳곳에 그려진 삽화는 판화가 콕의 솜씨가 돋보인다. 지도에는 3개의 문장文章이 그려져 있는데, 상단 왼쪽의 화려한 문장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이고, 그 오른쪽은 프랑스 왕실의 문장이며, 지도 하단 오른쪽은 포르투갈 왕국의 문장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1556년부터 1598년까지 스페인의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Felipe II와 1559년부터 1562년까지 네덜란드를 섭정했던 그의 이복 여동생 마르가리타 데 파르마Margarita de Parma를 인정하는 공식 지도라 할 수 있다.

대서양·태평양 연안, 지금과 유사
대항해시대 당시 아메리카로의 신항로 발견과 식민지 개척으로 경쟁하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는 신세계에 대한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494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중재로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의한 경계선은 베르데곶에서 서쪽으로 370리그league(1,786km) 떨어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을 그어 서쪽 지역은 스페인, 동쪽 지역은 포르투갈이 관할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의 해안선은 현재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유사하다. 캘리포니아반도는 일부만 그려져 있으나, 그곳에 ‘C. California’라고 표기되어 인쇄된 지도에 캘리포니아의 명칭이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며, 북미 중부의 ‘Apalchen’도 애팔래치아를 나타내는 최초의 명칭이다.

지금의 멕시코 중앙에는 분화하는 화산이 그려져 있고, 남미에는 아마존강과 라플라타강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의 브라질에는 잡아온 짐승을 손질해 바비큐 파티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남미 남쪽의 파타고니아에는 거인족이 그려져 있다.

바다에는 더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아일랜드 서쪽 바다에는 큰 발톱이 달린 해양생물이 파도 속에 모습을 드러내고, 북미 가까이에는 스페인 최성기의 통치자인 펠리페 2세의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 해양 괴물들 사이로 달리는 4두 마차를 탄 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에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원숭이도 그려져 있다. 대서양 적도 위에 있는 10여 척의 함대에는 ‘캘리컷으로 향하는 포르투갈 함대La Flota De Portugal Que Va Par Calicute’라고 쓰여 있어 인도에 대한 포르투갈의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대서양 남쪽 바다에는 해전 중인 함대들이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날치도 있다. 이밖에 멕시코 동쪽 태평양에는 침몰하는 배가 그려져 있고, 페루 앞바다에는 다가오는 배를 향해 활을 쏘는 인디오들이 있으며, 태평양 남쪽에는 인어들이 그려져 있다.

지도에는 상단에 두 군데, 중앙에 한 군데, 왼쪽 하단에 세 군데 등 모두 여섯 군데에 설명주기가 있다. 그중 상단 중앙에는 콜럼버스의 항해로부터 70년 뒤인 1497년에 아메리카대륙이 발견되었다는 통설의 근거가 되는 “세계의 이 네 번째 대륙은 1497년까지 모든 지리학자들에 의해 미지의 세계로 알려졌으나, 그때 카스티야Castile 왕을 섬기던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발견되어 발견자의 이름을 얻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지도 상단에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
태평양 적도 밑에는 “카를 5세Karl V의 나라 페루는 1530년에 조사되어 발견되었으며, 옛날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금이 발견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이 지도의 제작 부수와 배포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 지도는 아메리카대륙에 있어 스페인 세력권의 경계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존재를 인정할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법 많은 부수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지도는 앤트워프에서 콕의 인쇄업을 적극 후원했던 앙투안 페레노 드 그랑벨Antoine Perrenot de Granvelle이 1559년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분쟁을 마무리 지은 카토 캉브레지Cateau-Cambrésis 조약의 스페인 측 교섭관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요청을 받아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월간산 2022년 6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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