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가 골절된 상태로 주사맞고 경기를 뛰었습니다"

김종수 2022. 6. 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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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42)] '불사조' 김성은

 

 

“정말 잘했던 선수인데, 많이들 모를거에요”


용인대 농구부 김성은(46‧184cm) 전 감독을 향한 동료 농구인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학창시절부터 남다른 재능과 승부욕을 뽐내며 최고의 빅맨중 한명으로 위용을 떨쳤지만 짧은 선수 생활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지않음을 안타까워하는 반응 일색이다. 실제로 고등학교 시절 전국에서 1, 2위를 다투던 센터였으며 실업 시절에는 아시안게임,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는 등 최고 수준의 기량을 인정받았다.


불운한 천재 센터 김성은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다. 그녀는 이른바 ‘그 시절’ 주먹구구식 부상 관리의 희생양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몸이 아프면 의미가 없다. 가지고 있는 무기의 사용 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으로 그 과정에서 마음까지 망가지기 십상이다. 최근에는 부상에 대한 심리치료까지 병행되는 등 전문적인 치료와 관리가 함께 하고 있다. 선수가 건강해야 더 오랜 기간 꾸준한 활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달랐다. 제대로 된 치료 여부를 떠나, 정신력 문제부터 들먹였고 참고 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당연히 경기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 선전이라도 하는 날에는 ‘부상투혼’이라는 단어로 포장했다. 선수가 아프다고 호소할 경우 진단보다는 진통 주사부터 들이밀었다. 말 그대로 소모품 취급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블록슛의 여왕’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이종애(47‧187cm)는 “단순히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짧게 마친 인물에 대한 아쉬움 정도가 아니다. 정말로 엄청나게 잘하던 선수였다. 학창시절 숭의여고와 맞붙을때마다 힘들었는데 이유는 김성은이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골밑에서의 다양한 움직임에 더해 승부욕이 워낙 강한지라 본인뿐 아니라 팀 전체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빅맨이었다”고 김성은을 기억했다.
 

 

 


“용인대 농구부 해체,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요새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예전에 석사까지만 마쳐서 박사 과정을 밟고있어요. 용인대학교 여자농구부 감독을 그만둔 후 무엇을 할까 생각해보았는데 못다한 공부가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지도자를 하면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알고 싶기도 하고, 더불어 공부라는게 하면 할수록 더 깊게 들어가고 싶은 영역인 것 같아요. 스포츠 심리를 전공하고 있는데 차후에 지도자를 할 일이 또 생기더라도 이래저래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요새 멘탈스포츠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선수들의 마음 상태까지도 살필 수 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Q.용인대 여자농구부 해체가 한때 이슈였잖아요. 당시 감독님이셨고요.
맞습니다. 제가 그때 감독을 맡고있었죠.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지금도 불쑥불쑥 당시 생각이 나요. 사실상 잊을 수가 없죠. 2016년도부터 여자 농구부에 대한 위기설이 불거지기 시작했어요. 학교 자체적으로도 해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나 보더라고요.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이해가 되지않아요. 보통 해체에 관한 말이 가장 많이 나올 때는 성적부진이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전해에 대학리그 챔피언전까지 치러서 통합우승을 이뤄냈어요. 용인대로서도 경사였죠. 이후 MBC배를 다녀온 뒤 교수님이 부르더니 ’학교에서 일부 운동부에 대해서 구조조정이 들어가는데 여자농구하고 레슬링이 대상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잘못들었나싶었어요. 사실상 납득이 가지않는 상황이잖아요.

Q.이해가 안되네요. 성적이 좋은데 해체라니요?
지금도 대부분 사람들이 이해 못하고 있어요. 오죽하면 해체를 막기위해 당시 WKBL, 농구협회 등에서 신선우, 방열, 최명룡 등 대선배님들까지도 한꺼번에 오셨던 기억이 나요. 명분도 없거니와 학교 측 몇몇분 빼고는 아무도 해체를 원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부당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는 일개 계약직 직원일뿐이잖아요. 학생들 입장을 대변해서 적극적으로 얘기는 했지만 사실상 힘이 없었죠. 2015년도부터 대학연맹에서 여자농구리그를 시범적으로 시작했고 그 다음 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거든요. 그로인해 나만 잘하면 대학교를 가서도 충분히 기량을 발전시키고 프로까지 노려볼 수 있겠구나하는 인식도 선수들 사이에서 생겨났고요. 여자대학농구가 발전하는 시기였죠. 그런데 학교측에서는 역주행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Q.장밋빛 꿈을 꾸고 온 학생들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용인대에 들어왔는데요. 여자 농구부에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선택한건데 그 핵심이 사라지는거잖아요. 프로로 가려다가 실력 향상을 위해 대학행을 선택한 학생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해체 선언을 해버리면 학생들의 진로는…, 저야 감독 안하면 그만이지만 학생들은 다르잖아요. 지도자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정말 없구나하는 것을 느꼈을 때의 자괴감은 정말 말도 못해요. 법정으로 예를 든다면 저는 변호사일뿐이고 검사, 판사는 모두 학교측인거잖아요. 아무리 이쪽에서 간절하게 얘기해도 학교에서 아니라고 판단하면 그것으로 끝인거에요. 부모님들도 난리가 났죠. 2016년 신입생들이 졸업할 때까지는 농구부를 유지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의미가 없잖아요. 프로에 가려고 아이들을 보낸건데 해체가 결정난 농구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당장 그 아래 학번부터 쓸만한 기량을 가진 아이들이 용인대를 들어오려고 하지는 않을거란말이에요.


 

 


Q.농구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겠네요.
반반이었어요. 일단 미래가 없어졌다는 점에서 암울한 것은 사실이었죠. 당시 지도 교수님께서 13년간 농구부를 맡아서 하셨는데 막상 일이 그렇게되니까 전혀 신경을 안쓰시는거에요. 가장 앞선에서 싸워주실줄 알았거든요. 그러다보니 ‘적어도 이 아이들이 졸업할 때까지는 나라도 남아서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 역시 주위에 본인들 편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더욱 이을 악물고 저희끼리 똘똘 뭉치게됐죠. 어떡하겠어요. 학창 시절 내내 농구만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는 학교측에서 저도 필요없다고 했어요. 어차피 해체가 확정된 상황에서 모든게 다 출혈이다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저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고립된 아이들을 감독도 없이 방치한다? 너무 잔인한 일로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무보수로라도 해당 학번 친구들이 졸업할 때까지 함께 하겠다고 했죠.

Q.무보수요? 감독도 생활인이잖아요?
맞아요. 사람마다 어디에 있던지간에 거기에 맞는 위치가 있잖아요. 용인대 농구부에서는 제가 감독이지만 집으로가면 또 누군가의 아내고 엄마일 것 아니에요. 그런저런 것을 떠나서도 사람이 일을 하는데는 돈이라는 부분은 빼놓을 수 없죠. 저도 하다하다 안되서 꺼내든 카드였어요. 스승으로서 제자들이 가장 힘들 때 떠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더라고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여성 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부분도 있었던 듯 싶어요. 남성 감독같은 경우 집에서 가장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그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저는 그래도 남편과 함께 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는 살짝 자유로웠거든요. 남편도 그럼 그렇게하라고해서 이해해줬고요. 다행히 학부모님들이 난리를 쳤어요. 말도 안된다고요. 그래서 이전처럼 감독직을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Q.농구부내의 끈끈함은 말도 못했겠어요.
그렇죠. 각자 더 이상 갈 곳이 없잖아요. 마치 당시 분위기는 우리는 용인대 농구부지만 우리외에는 모두 적처럼 느껴지는? 누구도 믿지 못하니 우리끼리 뭉쳐서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이겨내보자고 서로 뭉쳤죠. 팀 분위기는 이전보다도 더 단단해졌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우리가 더 잘해서 문제없다는 것을 보여줘야만이 외부에서 봤을 때 ‘저런 팀이 왜 해체를 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보자 그런 생각이었죠. 그때까지도 어떻게든 농구부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지 밖에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죠. 그런 의지를 가진 아이들과 함께 할수 있었다는 것이요. 실제로 중간에 하차한 선수들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Q.이후 신입생은 받았나요?
2016학번 밑으로 매해 3명씩 받았습니다. 왜냐면 해당 농구부원들을 졸업시켜줘야 하니까요. 적어도 최소 숫자는 맞춰야 농구부가 돌아가잖아요. 문제는 이후에 들어온 학생들은 학교측에서 책임지지 않는 것이죠. 약속한 것은 2016학번까지만이었으니까요. 그렇지않아도 학교에서 신입생 면접을 볼 때 저희 지도교수님께서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오겠냐?’고요. 어떤 면에서는 2016학번 뿐 아니라 밑의 후배들에게도 미안한 일이죠. 그래도 대단한 것은 그 학생들마저 들러리에 그치지않고 주인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했다는 부분입니다. 2016학번이 졸업하고 1년이 지난후 6명이 남았을 때도 다들 포기하지않고 열정을 보였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가 터지고 대부분 대회가 잠정 중단되면서 거기서 멈추고 말았죠. 학교 측에서도 대회가 열리지 않으니 그만두라고 권유했고 저도 더 이상 명분이 없어서 2020년도 2월에 감독직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여기서 잊지말아야 할 것은 마지막 남은 3명마저도 그런 상황에서 3x3대회까지 나갔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어른들 입장에서 많이 미안할 일이죠. 그 아이들을 위해 감독을 그만둔 뒤에도 종종 나가서 함께 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Q.혹시 지금도 여자 농구부 부활에 대한 얘기는 있나요?
간간히 얘기는 나온다고 들었어요. 이런저런 명분적인 것은 그렇다쳐도 일단 용인대 여자농구부는 운영비가 거의 안들어갔어요. 대학리그같은 곳을 나가면 주최측에서 대부분 경비를 대줘요. 학교에서 부담해야 될 돈은 없다고 봐도 되요. 더불어 선수가 프로로 가게되면 드래프트 지원금이 연맹에 들어갔다가 각 학교로 배분되요. 학교측에서 가장 좋은 것은 모교 선수가 뽑히는 것이겠지만 그렇지않더라도 참여만으로 이익이 발생하죠. 그런 돈은 운동용품 구매, 전지훈련비 등으로 쓰여지고요. 더불어 등록금같은 경우는 학생들 각각이 따로 내겠죠. 여기까지만봐도 학교측에서는 손해날 일이 전혀 없어요. 거기다 성적까지 나오게되면 학교 이름을 여기저기 알리게 되는 것이고요. ‘도대체가 미스테리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Q.예전과 달리 여자부 대학농구 전체의 위상도 많이 달라지기는 한 것 같아요.
그건 맞아요. 용인대의 아쉬운 케이스만 얘기해서 그렇지 예전과 여자 대학농구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어요. 최근에 조금 주춤하기는 한데 그래도 위상 면에서는 올라간 것이 사실이에요.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저희때 그리고 크게 차이나지 않는 후배 때까지만 봐도 여자 농구 쪽에서 대학은 변방이나 다름없었어요. 대부분이 고등학교만 마치고 실업, 프로로 바로 진출하던 것이 대부분이었잖아요. 대학은 선수 생활에 크게 미련이 없거나 혹은 은퇴하고 학업에 뜻이 있던 케이스들만 가는 곳이었죠.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변화가 생긴 분위기에요. 또래들 중에서 워낙 재능이 뛰어나거나 신체적으로 잘 만들어진 선수들은 프로에 와서 1~2년만 적응하면 즉시전력감으로 뛸 수 있어요. 반면 좀 더 담금질이 필요한 선수도 있거든요. 이런 케이스는 차라리 대학행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프로에 드래프트되었다 해도 처음부터 경쟁에서 밀려버리면 몇 년 후에도 그 상태 그대로를 반복하다가 조기 은퇴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럴바에는 대학에서 공부도 하면서 미래를 대비하고 체력, 기술적으로 준비를 더 하는거죠. 보통 그런 생각을 하고 대학에 오는 선수들은 의지도 강해요. 누가 시키지않아도 열심히 합니다. 더욱이 요즘은 대학리그도 활성화되어서 거기에 맞춰서 뛰게되면 몸관리, 체력관리 등의 노하우도 자연스레 익히며 성장하게 되더라고요. 대학리그에서 눈에 띄면 프로의 관심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승부욕은 엄청났습니다”

Q.학창시절부터 리더십이 뛰어났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별로 그러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떤 분들은 저를 카리스마, 리더십 그렇게 아시는 분들도 상당히 되시더라고요. 사실 학창 시절의 저는 되게 내성적이고 조용한 스타일이었어요. 나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요. 반면 승부욕은 되게 강했던 것 같아요. 지는 것 싫어하고 접전에서 더 피가 끓어오르고…, 농구는 팀 스포츠잖아요. 우리 팀이 질 것 같으면 막 악을 쓰면서 돌격대장 역할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리더십이 강한 것처럼 느낀 분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승부욕이 강한 선수들이 더 이를 악물면 분위기 전체가 달라지기도 하거든요. 제가 운동신경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골밑에서 경기할 때가 많았던 것에 비춰봤을 때 불리한 조건이죠. 하지만 승부욕이 워낙 강해서 버티어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때 달리기 시합에서 기절한 기억도 나네요. 그때 1등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못견딜 정도로 너무 힘이 드는거에요. 보통 그러면 포기를 해야하는데 그러기가 정말 싫어서 계속 뛰었어요.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쓰러졌어요. 기절했던거죠.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초등학교때 신체검사를 하잖아요. 어느날 신체검사 결과를 보고 어떤 선생님께서 집으로 전화를 하셨어요. 제 키가 커서 관심이 갔던거죠. 하필이면 그 전화를 제가 받았어요. 그때가 5학년때에요. 어찌보면 그 통화가 제 인생을 바꿔놓았어요. 전화를 한 선생님 목소리가 제가 4학년때 정말 좋아하던 선생님이랑 너무 흡사한거에요. 전근을 가셔서 너무 그리웠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비슷한 목소리를 들으니 너무 놀라고 기뻤어요. 내용을 떠나서 음성만으로 바로 기분이 좋아져서 저도 모르게 바로 한다고 그 자리에서 승낙해버렸어요. 부모님 허락도 안받고요.(웃음) 이후 아버지께서 다시 선생님하고 연락을 주고받으며 마무리를 지으셨죠. 감사하게도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하고싶다는 것은 특별한 반대없이 대부분 들어주셨어요.

Q.처음에는 어떤 포지션을 맡았나요?
아무래도 키가 크다 보니까 센터를 봤어요.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신장이 좋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잖아요. 제가 농구를 빨리 시작한 편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뛰어나지도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았지만 키에서 경쟁력이 있다보니 중학교 1학년때부터 일찌감치 경기를 뛰었던 것 같아요. 보통 키 큰 선수가 일찍부터 많은 훈련량을 가져가거나 경기를 자주 뛰면 여기저기 아프기도하다고 하잖아요. 다행히 빈혈말고는 딱히 아팠던데는 없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튼튼했던 몸에 감사하죠.

 

 


Q.당시 롤모델같은 존재가 있었을까요?
중학교 때는 농구대잔치를 보러 많이 갔거든요. 아무래도 같은 포지션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때 한창 날리던 빅맨이 삼성생명 성정아 선배님과 국민은행 조문주 선배님이셨어요. 그냥 어린 눈으로만 봐도 대단했어요. 멋지다. 잘한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죠. 너무 먼거리에 있는 느낌이 들어서 롤모델이라기보다는 그냥 스타를 보는 기분이었죠. 손에 잡힐 것 같지않을 정도로 잘하던 선배님들이셨으니까요. 이후 고등학생이 되면서 농구에 대해 어느 정도 눈을 뜨게되고 욕심도 생기더라고요. ‘난 정말 잘할거야.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잘하는 선수가 될거야’라는 생각도 했던 기억이 나요. 앞서도 말했듯이 저는 운동신경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어요. 그것을 잘 알고 있다보니 상대와 거친 몸싸움도 자주 벌이고 제가 어떻게 코트에서 살아남아야하는지 빨리 깨달았던 듯 싶어요. 스탭도 잘 뽑는 편이었고 다양한 포스트 플레이 혹은 미들슛 등이 주 옵션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이것도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떤 쪽에서 경쟁력이 있는지를 빨리 알아야 거기에 맞춰서 성장이 가능하거든요.

Q.학창시절부터 전국구 빅맨으로 유명세를 떨쳤다고 들었어요.
정작 실업선수로 보여준게 너무 없어서 쑥스럽지만 학창시절에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당시에는 프로가 아닌지라 신인드래프트제도가 없었거든요. 스카우트를 통해서 선수를 영입했죠.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협회장기대회, 대통령배 대회 등을 우승시키는 등 활약이 좋아서였는지 1학년 때부터 다수의 팀으로부터 영입제의가 있었어요. 어찌보면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는데 저의 선택은 현대산업개발이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마음 속에서 정해버렸어요.

“현대산업개발 선택, 왕따까지 당했습니다”

Q.당시는 선수 개인 못지않게 학교 측의 의견도 중요하던 시절아니었나요?

맞아요. 당시에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졌지만 저를 둘러싸고 스카우트 파동 기사도 나고 그랬어요. 학교에서는 제가 코오롱에 가기를 원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현대산업개발로 간다고하니 난리가 난거죠. 보통 개인이 그렇게 강하게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거든요.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고 저도 엄청 힘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몇 순간중 하나가 바로 그때였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깨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니까요.

Q.그렇게까지 해서 현대를 가려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묻더라고요. ‘코오롱하고 현대산업개발하고 어디를 가고 싶냐?’고. 아무래도 두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러브콜이 들어왔으니까요. 저도 나름대로 생각을 해봤죠. 일단 코오롱은 이은석(191cm), 김정민(190㎝) 두 언니의 ‘트윈타워’에 민경화 선수까지 장신자가 정말 많았어요. 반면 현대는 고 서경화(182㎝) 선배님이 계셨지만 노장이셨어요. 거기에 최고의 가드 전주원 언니가 있었고요. 아무래도 현대를 가는 쪽이 일찌감치 기회도 많이 받고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결국 저희 부모님께서 현대산업개발 측과 가연고에 합의했어요. 그 과정에서 규정에 살짝 어긋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제대로 몰랐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그 외에도 비슷한 케이스가 좀 더 있었겠지만 제가 가장 유명세(?)를 탄 것 같아요. 제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지금와서보면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더러 있었죠.

 

 


Q.남은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랬죠. 학교에서는 제가 대형사고를 쳐버린 셈이 되었으니까요. 특히 이옥자 선생님께서는 코오롱에 보내고 싶었는데 제 고집으로 무산된 것에 대해서 많이 화가 나셨어요. 코오롱과 연습 경기도 많이 가지는 등 친분관계도 돈독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일찌감치 현대산업개발행을 선언해버리니까 배신감도 드셨을거에요. 그래서인지 이후 남은 시합 등에 출전을 안시키고 벤치에 앉아있게 하더라고요. 한 학기 정도 내내 그랬던 것 같아요. 여름에 일본으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도 훈련 등에 참여를 못했으니까요. 정말 힘들었던 것은 이른바 왕따였죠. 시합, 훈련 배제 등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심지어 웨이트 트레이닝도 못했고 남들 훈련 할 때 벽보고 서있고 그랬죠. 육체뿐 아니라 정신으로도 매우 힘들었습니다. 너무 수치스럽고 괴로웠어요. 그때 숙소 생활을 했는데 선배, 동기 등 아무도 저에게 말을 안걸었어요. 선생님의 특명이 떨어진거죠. 더불어 언론에서도 온갖 악의적인 기사가 많이 쏟아졌습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있어요. 일종의 시사 만평 연재물인데 거기에서 스승은 어항, 제자는 그 속의 물고기로 나와요. 그리고 외부에서 누군가가 돈으로 낚시를 하는데 물고기가 덥썩 무는 것이죠. 저와 학교 그리고 현대산업개발의 관계를 그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정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쨌든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집에는 별 얘기 안했어요. 얘기해봤자 부모님 속만 상하시잖아요. 그러던 어느날 부모님이 학교를 찾아와서 상황을 알게된거에요. 화가난 부모님이 교장실까지 찾아가 ‘우리나라는 직업 선택의 자유도 없느냐?’고 항의 하시기도 했어요.

Q.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좀 독기가 있었나봐요.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니들 잠들었을 때 몰래 내려가서 혼자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는 등 최소한의 몸상태는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남들에게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화장실가서 물 틀어놓고 울고 그랬죠. 정말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2학년에 올라간 후 정진경(190cm)이라는 센터 유망주가 들어왔어요. 신장도 좋고 가능성도 무궁무진했던 선수였던지라 팀에서도 마음먹고 키우려고 했죠. 그러다보니 제가 파트너로 나서는 경우가 늘어났어요. 제가 패스해주고 진경이가 넣고 하는 등 서로 호흡이 잘맞았죠. 하지만 한참 동안 공백기가 있었던만큼 개인적으로는 기량적 정체기가 찾아오더라고요. 1학년때 만큼의 경기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학년을 보내고 3학년에 되어서야 다시 폼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때는 선생님께서도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고요. 하지만 서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다소 껄끄럽고 불편한 감정은 계속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정도 풀리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전국체전 마지막 경기를 남겨놓고 있었는데 결승전이 이종애의 인성여고였어요. 경기를 앞둔 전날 밤에 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저를 부르시더라고요. 그리고는 ‘나는 내일 경기에서 너를 믿는다’고 짧게 한마디하셨어요. 순간 그동안의 설움과 응어리가 확 풀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죠. 선생님께서는 어떠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랬어요. 더불어 ‘선생님도 그간 이래저래 힘드신 부분이 많았구나’ 싶더라고요. 선생님하고는 대학에서도 또 인연이 있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해요. 그때 그래놓고 어떻게 또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냐고요. 하지만 저는 그때 정말 많은 부분이 풀어졌어요. 그리고 다음날 경기를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골절된 다리로 주사를 맞고 뛰어다녔습니다”

Q.그렇게 현대산업개발을 갔지만 정작 선수 생활은 짧았어요.

그러게요. 롱런한 줄 알았는데 제가 선수 생활이 너무 짧기는 했죠. 스타트는 나쁘지 않았어요. 주전과 백업을 오가면서 1년차부터 어느 정도 경기 출전 시간을 받으면서 꾸준히 경기를 뛰었거든요. 2년차부터는 대부분 주전으로 나섰고요. 아시안게임 대표, 올림픽 대표로도 뽑혔어요. 그때 임영보 감독님이 현대산업개발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오셨습니다. 저한테 기회도 많이주셨고 덕분에 기량도 많이 늘었던 시기에요. 감독님께서 훈련을 정말 많이 시키셨어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7시부터 훈련을 시작했으니까요. 대부분 선수들은 아침에는 슈팅 연습을 많이해요. 저같은 경우는 포지션이 센터다 보니까 피벗 연습만 거의 한시간을 하면서 하루의 스타트를 끊었어요. 그 외 피벗과 관련된 다양한 움직임, 1대1 플레이 등을 집중적으로 했죠. 아침은 물론 야간시간대에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튼튼하다고 자부했던 몸에 이상이 오더라고요. 메인연습 외에 개인훈련을 지나치게 했던 것이죠. 피로골절이 생겨버렸습니다.

 

 


Q.선수생활 내내 악재로 작용했던 부상 악령이 시작된 것인가요?
그렇죠. 제 몸이 견디지 못할 만큼의 충격이 누적되었던 것 같아요. 실업 1년차 때인가 8강전에서 떨어졌을거에요. 당시 청운동 숙소가 돌아가신 현대가 정주영 왕회장님 자택 근처에 있었거든요.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회장님께서 농구에 애정이 많으셨어요. 선수 스카웃할 때 투자도 많이 하시고 가까이에서 선수들을 보려고 숙소도 근처에 두셨던 것이죠. 저 역시도 저희 학년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스카웃비를 많이 받은 케이스거든요. 그렇게해도 성적이 안나오니까 선수단을 불러들이신거죠. 그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으면서 ‘왜 이렇게 성적이 안나오느냐?’한마디 하셨죠. 한마디로 혼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임영보 감독님이 오신거에요. 답은 뻔하잖아요. 성적을 올리라는 특명을 받고 온 것이죠. 감독님께서 훈련을 엄청나게 시키셨고 그 결과 다음 해에 우승은 못했지만 결승까지 진출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피로골절이 생겼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 뛰었어요. 당시에는 그렇게 무식했습니다. 시키면 무조건하고 아파도 뛰고…

Q.어? 골절된 상태로 뛰었다면 굉장히 무리가 갔을 것 같아요.
갔죠. 의료진이나 트레이닝 파트가 제대로 갖춰진 시절도 아니잖아요. 나중에 정강이뼈 수술을 했거든요. 그전에는 피로골절인 줄도 모르고 아픈 부위에 뜸을 뜨고 막 그랬어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죠. 그러고나서 시즌 끝나고 올림픽대표로 선발됐는데 그전에 병원을 가봤더니 피로골절이라고 하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종아리뼈가 되게 두껍잖아요. 그 뼈가 반 이상이 골절이 된 상태였어요. 더 뛰면 아예 부러진다고 하더라고요. 그 수술을 하느라고 대표팀도 뛰지못했죠.

Q.불행중 다행이네요. 잘 수술하고 재활까지 끝마치셨나요?
의사가 정해준 기간까지는 무리하지말고 재활까지 해야 정상인 것 이잖아요. 제대로 뼈가 붙기 전까지는 훈련을 하면 안되요. 하지만 감독님께서는 ‘뛰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겉으로보기에는 제법 멀쩡해보였나봐요. 곧 시즌도 돌아오고 그러니까 연습 경기도하고 몸을 만들라는 뜻이었겠죠. 하지만 제대로 몸도 안움직여지고 통증이 크더라고요. 다리가 너무 아프다고 말씀드렸더니 감독님께서는 ‘마음가짐이다. 네가 아프다고 생각하니까 아픈거다’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뛰게되니까 뼈가 제대로 붙지않고 바깥으로 밀려나가고 안에 공간이 넓어지는 부작용까지 생기고 말았죠. 더 나빠진겁니다. 그래도 어쩔수없이 그 상태로 경기를 다 뛰었습니다. 피로골절은 제 선수 생명을 앗아간 주범이에요. 크게 2번을 수술했는데 모두 휴식과 재활이 제대로 안되어서 효과를 온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Q.제대로 치료를 해서 좋은 몸상태로 뛰게하는게 길게보면 더 좋았을텐데요. 이해가 안됩니다.
모르겠어요. 그만큼 마음이 급하셨던 것 같아요. 당장 성적이 나지않으면 잘릴 수도 있는게 지도자의 세계잖아요. 이것저것 길게 볼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부상이 다 나아갈 무렵 또 다른 통증이 찾아오더라고요. 골수염같다는 얘기를 듣고 일본에서 검사 및 치료를 받고 재활까지 들어갔어요. 저도 정말 부상이 지긋지긋해져서 안아픈 상태로 경기를 뛰는게 소원인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정상적인 치료가 되어야 했죠. 하지만 아니라다를까 한국에서 다시 연락이 와서 경기를 뛰라고 하더라고요. 걷기도 힘든데 경기를 뛰라니 앞이 캄캄했어요. 여기서 또 잘못되면 어쩌나하는 불안감도 심했고요. 일본에서는 ‘그러다 큰일난다. 가지말라’고 붙잡았습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시키면 해야죠. 마음이 급한 감독님 입장에서는 제가 완치되기를 기다리기가 힘드셨을 것입니다. 어쨌든 통증이라도 줄여보려고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고 코트에 나갔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몸상태도 아니고 훈련도 제대로 못했는데 경기력이 제대로 나오겠어요? 평소에 많이 못미쳤죠. 그럴 때마다 감독님께서 질책을 많이 하셨는데 제 입장에서는 되게 수치스러운 상황도 많았어요. 외부에 ‘우리는 센터없이 경기한다고 생각해’등의 말을 했을 때는 ‘살고 싶지않다’는 심정까지 들었어요. 심지어 ‘너 고등학교 때 그 천대를 다 받고 실업에 왔는데 그렇게 경기해서 되겠어. 보란 듯이 해봐야지’하면서 이전의 상처까지 건드리시더라고요. 쌍욕은 기본옵션이고요. 정말이지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든데 나보고 뭘 어쩌라는것인가’ 매경기 속으로 울었습니다. 밤에 잠도 안와서 매니저한테 수면제를 달라고해서 몇주동안 계속 복용한 적도 있어요. 언젠가는 너무 힘들어서 옆에다 유서까지 써놓고 한꺼번에 입에 다 털어넣어버리기도 했고요. 다음날 일어나고 싶지않았어요. 그런데 웃긴게 아침에 후배가 ‘언니 식사하세요’라는 말에 눈이 번쩍 떠지는거에요. ‘아…, 나는 약에도 세구나’하는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Q.감독은 농구지도자지 의료진이 아니잖아요.
맞아요. 감독님은 농구 쪽에 있어서는 박학하시겠지만 의료적인 부분에서는 의사나 당사자만큼 알 수 없잖아요. ‘너가 아프다고 생각하니까 아픈거지’하는 말씀은 진단이 아니라 그냥 감독님의 바램인 것이죠. 하지만 어린 저는 감독님의 말씀이니까 맞겠지하고 애써 믿으려고 했습니다. ‘설마 스승이 제자가 안되길 바라겠어’하는 단순한 마음뿐이었죠. 지도자도 한명의 생활인이고 직장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너무 자주 맞으니까 몸에 무리가 엄청나게 갔어요. 근육하고 피가 유착이 되어가지고 지나가다가 어디에 부딪히기만해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쉽게 벗겨져 버렸어요.

Q.결국 그러한 과정이 조기 은퇴의 이유가 된거네요.
1998년 프로 시범경기를 할 때 였을거에요. 아마 원주대회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쫄쫄이 유니폼입고 그럴 때였거든요. 제가 플레이할 때 스탭을 많이 뽑는 편이라고 했잖아요. 당시 훈련 상황에서 강지숙 선수가 점프했다 내려오면서 제 정강이를 찼는데 그 충격으로 피부가 확 하고 벗겨저버렸어요. 다리 뼈가 보일 정도였어요. 고통도 고통이지만 심리적으로 데미지가 너무 크게 왔어요. 병원에서 봉합을 시도하는데 제대로 되지않고 계속 찢어지더라고요. 그때 ‘나는 안되겠구나. 이번 시즌만 뛰고 그만둬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선수 생활이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삶이 걱정될 정도였으니까요.

Q.많이 무서웠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선수는 계약기간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렇죠. 원래는 은퇴가 안되는 것이었거든요. 무조건 5년을 뛰어야 되는 입장이었죠. 안되겠다싶어서 현대산업개발 본사로 사장님을 찾아갔어요. 그리고는 다리를 보여주면서 ‘사장님께서 따님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계속 농구를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렸죠. 다행히 사장님께서 받아주셔서 위약금 그런 것 없이 그대로 은퇴를 하게 되었어요. 팀에서는 당연히 붙잡으려고 했었고요. 제가 어지간해서는 지금도 반바지를 잘 입지않아요. 다리에 흉터가 여전히 있거든요.

 

 


“선수 마음을 알아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Q.지독한 부상과 싸워온 만큼 부상에 대한 시선도 남다를 것 같아요.

맞아요. 제가 지도자로서 어떤 사람인지는 저도 아직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수가 아프면 참고 뛰게 하지는 않아요. 제 선수 생활도 떠오르거니와 객관적으로봐도 그렇게 뛰어봐야 제 기량이 안나오거든요. 좋은 컨디션으로 뛰어야 경기력도 좋은 것이죠. 조금 아플 때 빨리 고치고 제대로 회복하라는 주의에요. 어찌보면 부상으로 점철된 저의 농구인생이 정말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아요. 학생들이 계속 농구만하다보면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판단력이 떨어져요. 지금 이게 불공정한 상황인지,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지를 하기 힘들 수도 있거든요. 설사 인지하고 있다 해도 자기 의견을 내기는 쉽지않겠지만요. 이제는 분위기나 인식도 많이 바뀌어서 그 정도까지 당하는 선수는 없을 것이라고 믿고싶어요. 어쩌면 당시 감독님께서도 나쁜 마음으로 그러시지는 않았을거에요. 예전에 농구했던 분이라 본인도 그렇게 지내왔고 또 그런 투지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을겁니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그랬을뿐이죠. 그런 케이스가 어디 저만있겠어요.

Q.김천시청에서도 선수로 뛰었어요. 농구에 대한 아쉬움이 컸던 것 같아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대학 시절 농구 선수 생활이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은 그때 농구를 할때는 정말 재미있게 해서에요. 보호대도 차고 그렇게 뛰기는 했지만 큰 부담없이 아파도 억지로 참지 않고 하다보니까 매경기 즐겁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농구를 보는 눈도 좋아지고 전국체전 우승도 하는 등 성적도 잘나왔어요. 프로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꽤나 좋은 모습을 보이니까 당시 박종천 감독님이 계시던 현대에서 ‘다시 뛰어볼 생각있냐?’고 연락도 왔습니다.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현대로 갔어요. 대학원도 진학하고 프로에서도 뛰고싶은 마음이었죠. 하지만 역시 프로는 프로더라고요. 대학교때와는 연습량 자체가 달라요. 그렇게 몸을 만들어야 정상적으로 게임을 뛰는게 가능하겠죠. 그러다보니 마음 속에서 갈등이 생기더라고요. 당초 목표는 대학원과 프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었지만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둘중 하나를 포기하는게 맞을 것 같았어요. 겨울리그를 잠깐 뛰기는 했지만 결국 대학원을 선택하고 김천시청으로 가게 됐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김성은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길게 가져가지 못해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단 한분이라도 떠올려 주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센터 출신은 지도자로서 성공한 사람이 드물다’는 말을 들었어요. 경력이 길지않은 지도자로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 편견을 깨고 싶어요. 센터로서 배우고 본 것도 엄청 많거든요. 거기에 다른 선수들과의 합을 맞췄던 여러 가지 과정까지…, 모두 잘 녹여서 좋은 선수들을 키우는데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독선적이지않고 소통하는 지도자, 후배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선배 농구인이 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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