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아파트 철거, '용적률 사기극' 돼선 안 된다[할 말 있습니다](11)

2022. 6. 2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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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에 있는 충정아파트. 김영준씨 제공


서울시는 2019년 4월 현존하는 최고(最古) 아파트 중 하나인 충정아파트를 문화시설로 전면 보존(기부채납)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충정아파트가 포함된 서울 서대문구 마포로5구역 제2지구(이하 5-2지구)의 용적률 상한을 기존의 526%에서 595%로 대폭 상향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기존의 용적률에 1할 이상을 얹어주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할 정도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가 보편화됐으나, 정작 원형이 된 초창기의 아파트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을 반영해 내린 결정이었다. 특히 서대문구라는 서울 시가지 한복판에서 80년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충정아파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전문가가 다양한 연구를 통해 아파트가 가진 역사성과 보존의 당위성을 주장해 오고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인 충정아파트

1937년 일본인 도요타 다네마쓰가 지은 충정아파트는 상·하수도는 물론이고, 수세식 변기와 가스·응접실, 거주민을 위한 식당 등을 갖춘 거주시설이었다. 당시로써는 ‘근대의 최첨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명 화가 김환기가 머무르기도 했던 충정아파트는 뛰어난 입지와 시설 때문에 역설적으로 다양한 주체에 의해 파란만장한 용도의 변화를 겪게 된다. 해방 직후 적산(敵産)으로 간주된 충정아파트는 미 군정이 미군숙소(트레머호텔)로 이용했다.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한 이후엔 ‘6형제를 잃은 아버지’라는 거짓말로 정부를 속인 한 개인이 충정아파트를 호텔로 통째로 불하받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에 다시 일반 아파트로 돌아온 충정아파트는 1979년 서울시의 충정로 확장 과정에서 전면부가 헐려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됐다.

충정아파트에 새겨진 이력은 단순히 오래된 아파트의 차원을 넘어 질곡의 한국 근현대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도시환경정비사업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의회 의견 청취·의결 과정에서도, 충정아파트의 가치와 보존의 당위성은 인정받았다. 2020년 9월 열린 서울 서대문구의회 재정건설위원회에서는 서울시가 제안하고 5-2지구 추진위가 수립한 정비계획 변경(안)에 대해 충정아파트 유지·보수 계획 구체화 등의 수정 의견 반영을 전제로 전원 찬성 의결이 내려졌다. 당시의 의사록에서는 충정아파트의 보존과 활용을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확인된다. 하지만 충정아파트의 보존 계획은 마지막 관문인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도계위)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2021년 8월에 열린 도계위는 5-2지구의 정비계획 변경(안)에 대해 보류 결정을 내렸다. 그로부터 10개월이 흐른 지난 6월 15일 재상정이 이뤄졌으나 결과는 전면 보존이 아닌 완전 철거였다.

1962년 5월, 전면부가 헐려나가기 이전의 서울 충정아파트. 석지훈(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씨 제공


철거 결정을 담은 서울시 도계위의 심의 결과가 확정되자마자, 언론에서는 이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다. 그중에는 ‘박원순표 흔적 남기기 사업의 종말’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가 있는 한편, 충정아파트의 역사성을 재조명하는 보도도 관찰됐다. 5-2지구가 충정아파트의 전면 보존을 조건으로 기존 용적률의 1할을 상회하는 인센티브를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내용은 찾기 어려웠다. 지난 6월 16일 서울시에 문의한 결과, “도시계획위원회에서는 충정아파트의 철거 결정만을 내렸을 뿐이며 5-2지구 추진위가 추후 제시하는 정비계획 수정안에 충정아파트를 대신하는 면적의 문화시설 기부채납이 이뤄진다면 용적률의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만약 5-2지구의 정비사업이 이대로 추진된다면, 3년 전 충정아파트의 전면 보존(기부채납)을 전제로 부여된 용적률 인센티브가 충정아파트의 전면 철거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셈이다.

건물을 남겨 활용하는 것과 제아무리 바닥에 표식을 남긴다 한들 철거해 공터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도시와 건축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후자를 전면 보존이라고 간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충정아파트와 같은 면적의 문화시설을 새로 지어서 기부채납한다는 이유만으로, 당초 충정아파트의 전면 보존을 전제로 부여했던 용적률 인센티브를 서울시가 철회하지 않는다면 이는 문화재를 인질로 삼은 ‘용적률 사기극’이라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오세훈 시정으로 넘어오면서 바뀐 태도

충정아파트가 이런 사례의 처음은 아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주공아파트,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아파트의 재건축 사업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한 동 남기기’ 사업 또한 충정아파트와 유사한 용적률 인센티브 문제를 안고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의 재임기 동안 서울시에서는 ‘근현대 유산의 미래유산화 기본구상’(2012), ‘2025 서울시 도시주거환경정비 기본계획 매뉴얼’(2015) 등의 수립을 통해 정비사업 추진 시 흔적 남기기 시설의 기부채납 인정, 용적률 인센티브 5% 부여 및 해당 기부채납 시설의 용적률 산입 제외와 같은 구체적인 근현대 문화유산 보존 및 활용 방안을 제도화했다. 반포주공아파트와 개포주공아파트에서 이뤄진 ‘한 동 남기기’ 또한 해당 주거동을 상가·문화시설로 리뉴얼하는 대신, 용적률 상향 인센티브를 부여받는 것은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

오세훈 시정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서울시의 태도가 바뀌었다. 2021년 12월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주거동의 완전 철거 안건이 상정됐다. 서울시와 강남구는 조합을 상대로 흔적 남기기 사업의 백지화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 내내 이미 부여된 용적률 인센티브에 대한 서울시의 공식적인 언급은 없었다. 이를 지적하는 보도 또한 찾아보기 어렵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21년 4월의 보궐선거 당선 직후부터 새로운 시정 슬로건으로 ‘다시 뛰는 공정도시 서울’을 내걸었다. 문화재 보존과 용적률 인센티브를 둘러싸고 지금의 서울시가 보여주는 태도는 ‘공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만약 충정아파트와 반포·개포주공아파트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지금과 같이 계속한다면 대표적인 ‘불공정’ 사례로 도시사(史)에 길이 남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이것이 ‘공정도시 서울’이 추구하는 서울의 미래상이었는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영준 도쿄대학 공학계연구과 도시공학전공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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