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산책] 한우물 '동네 할아버지' 임효생

양승률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2022. 6.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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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률 대전시립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약 300여 년 전인 1724년은 조선조 제20대 왕인 경종(景宗)이 죽고 영조(英祖)가 즉위한 해이다. 이 해 대전의 진잠 '한우물'이란 작은 동네에선 국상(國喪:왕실 초상) 뿐만 아니라 '동네 할아버지'인 '임효생(林孝生)'이란 인물이 죽어 동네 사람들이 매우 슬퍼하며 그를 기리는 비석을 세운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하다.

필자는 20여 년 전 뜻 있는 동네 분들에게서 '동네와 관련된 오래된 조선시대 비석을 판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극구 사양하다가 부득이 현장에 가서 비석을 탁본하고 보니 아예 안 보이는 글자가 있고, 크기도 작고 희미하게 파여 있어 판독에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간신히 해석해보니 내용은 너무나도 간략했다. 내용인즉슨 비석 앞면은 동네할아버지로 불리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는 벼슬의 임효생(林孝生)이라는 인물 이름과 부인 창원 황씨의 기록이 전부였다. 비석 뒷면에는 임효생의 이름과 자, 그리고 아주 간략한 그의 생애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효생(孝生), 자는 효원(孝源)이다. 그는 살아서는 선행을 하여 사방의 사람들을 살렸고, 죽어서는 슬프게도 자식이 없었다. 아! 이로 말미암아 공경할지니…'였다.

한우물 동네 분들이 전하는 그의 일생은 당시 기근, 흉년,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대에 부지런히 농사지어 쌓은 부를 가난한 사방의 이웃들을 위해 베풀었고, 죽기 전에 동네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기부 하였는데, 그 재산이 동네의 동계(洞契)를 통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온다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글을 작성하면서 비문에 적힌 내용과 이 같은 전승이 당대 역사적 사실과 어느 정도 부합됨에 놀랐고, 그의 재산이 오늘날까지 한우물의 동계를 통해 유지돼 왔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가 평범한 농민이면서 받았다는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은 나라의 진휼(賑恤: 흉년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 사업을 도운 공으로 받은 벼슬임을 알게 됐다.

역사기록에서 조선시대 기록은 어느 시대보다 많은 분량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는 글을 아는 식자층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일반 평범한 농민의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임효생은 문헌 기록이 아닌 비석이라는 금석문(金石文) 기록을 통해 매우 소략하지만 그의 생애가 남아 있고, 그의 뜻을 이어 한우물 동계에서 300여 년간 이어져 내려온 놀라운 역사 기록을 갖고 있다. 이를 기려서 2014년에는 한우물 동계에서 '한우물 마을과 동네 할아버지 유래비'를 세웠다. 유래비에는 임효생이 기증한 이후에도 신상하 등이 이어서 선행과 재산을 기증했고, 동계에서는 '이들의 훌륭한 뜻을 길이 보존하고 동계의 뿌리 깊은 전통이 후대에도 영원히 이어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모아 유래비를 건립한다'고 했다.

나라의 공식적인 역사기록인 정사(正史)와 다른 문헌기록의 뒤안길에서 하마터면 잊히고 사라질 뻔한 '동네 할아버지' 임효생의 '작은 역사'는 임효생과 그 뜻을 잘 이어온 마을 분들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려는 마음으로 보존되었다. 이는 한우물 마을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에서도 소중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역사자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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