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검색대도 없어 아무나 들어와 난동
응급실 범죄 10년새 11.7배 늘어
의사 71%는 폭언·폭력 경험
폭행범에게는 관대한 처벌
美, 응급환자 중증·경증 따로 관리
사건 생기면 병원장에 책임 물어
지난 24일 밤 9시 45분쯤, 술에 취한 60대 남성이 부산대병원 응급실에 나타났다. 그가 바닥과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자 응급실 안에 있던 환자와 의료진 50여 명이 황급히 대피했다. 그는 3시간 전 응급실에 실려 왔던 환자 남편. 자기 아내를 먼저 치료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린 것이다.
생명 구조 최전선인 응급실이 위태롭다. 최근 응급실 범죄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의사들이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 15일엔 경기 용인 한 중소 병원 응급실에서 70대 남성이 응급실 치료에 불만을 품고 낫을 가져와 의사 목 뒤를 찌른 일도 있었다.
경찰청 등이 집계한 응급실 범죄는 지난 2009년 42건에서 2018년 490건으로 10년 사이 11.7배로 늘었다. 지난해 9월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펴낸 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의사 2034명 중 최근 3년간 진료실에서 폭언·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 1434명(70.5%), 신체 폭력을 당한 사람은 305명(15%)에 달했다. 1년에 한두 번씩 폭력을 겪은 경우도 1106명(54.4%)이었다. 김태진 부산시의사회장은 “응급실에서 난동 사건이 터지면 의료진은 물론 환자까지 위험에 빠진다”며 “이런 돌발 상황 때문에 응급실이 폐쇄되기라도 하면 위급 환자를 치료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받기 때문에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의료진들은 우리나라 응급실이 개방형이라 폭력과 난동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병상이 밀집해 있고 진료 공간을 누구나 드나들 수 있어, 적은 수 의료진이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는 이점은 있지만 외부 침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어렵다. 응급실 의사 피습 사고가 터지자 2020년 4월 의료법 시행 규칙을 바꿔 100병상 이상 의료 기관에 보안 인력과 비상 경보 장치를 반드시 달도록 했으나, 1년 후 점검해 보니 설치율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응급 환자를 증상 정도에 상관없이 한곳에 몰아넣는 시설도 개선해야 할 지점이다. 응급실에 (폭력 사태 같은) 비상 상황이 터져도 중증 환자를 따로 관리하고 있다면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다. 실제 미국은 많은 지역에서 경증 응급 환자를 다루는 응급 클리닉을 분리해 운영하고 있다. 최성혁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은 “응급 환자를 중증도에 따라 나눠 진료하는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의료진 사이에는 의료법이 실제론 느슨하게 작동한다는 불만도 내놓는다. 현행법은 의료진을 폭행해 상해·사망에 이르게 할 경우 징역형과 고액 벌금, 가중 처벌 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입건부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응급실 소동은 다른 환자들 생명까지 위협하는 중대 사안인데, 경찰이 대개 일반적인 단순 소동처럼 간주하다 보니 응급실 난동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전공의들은 “오늘 욕설 듣고, 내일 성희롱을 당하고, 모레 뺨을 맞아도 처벌받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또 똑같은 일을 당하면서 계속 근무하고 있다”고 푸념한다.
병원장이나 책임자도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미국·일본 등에선 ‘(응급실) 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보다 ‘안전한 의료 환경 조성’에 중점을 둔다. 미국은 ‘직업안전보건법’을 통해 병원 측에 안전한 작업장 제공 의무를 부과한다. 이를 어기면 제재 조치를 내린다. 일본은 후생노동성(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를 합친 조직)에서 의료 기관 관리자가 의료 기관 종사자 안전을 위해 해야 할 사항을 규정하고 공표하도록 의무화했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보건 의료 인력을 고용하는 병원장, 지역보건소장, 중앙의료센터장이나 보건복지부 관료들이 의료진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책임감을 더 느껴야 한다”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이들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게 하는 법안 마련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사회장은 “응급실은 언제든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높은 지역이란 사실을 고려해서, 해외 선진국처럼 응급실 입구에 공항 검색대와 금속 탐지기를 두거나 접수처에 방탄유리를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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