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지역갈등의 역사와 독립운동, 민주주의

신주백 역사학자 2022. 6. 28.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믿고 자신을 노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교류만이 상호 부정적 인식과 고정관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거버넌스가 학술 및 문화연구, 환경 및 생태, 보건의료 분야일 것이다
또한 한국적 중앙집권화와 분단구조를 넘어서는 과정서 동서분열을 해소하는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은 근본적인 대책이다

1986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삼성 대 해태의 싸움이었다. 1차전 광주 경기 때였다. 해태의 강타선을 7회 말까지 잘 막은 삼성의 투수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다 해태 팬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았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삼성은 투수를 교체했다. 하지만 해태는 교체된 투수를 공략하여 역전승하였다.

신주백 역사학자

삼성 팬들은 분노하였다. 해태 팬의 부당한 행위로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분노의 감정은 대구에서 열린 3차전이 끝나고 폭발하였다. 이때도 삼성은 해태에 역전패했다. 이에 화가 난 일부 삼성 팬이 해태 구단버스에 불을 질러버렸다.

두 팀의 한국시리즈는 운동 시합에 그치지 않고 지역민의 자존심과 열망을 대변하는 경쟁이었다. 그래서 팬들이 저지른 일탈 행위의 밑바탕에는 지역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 서북차별과 남북갈등 그리고 독립운동

영호남 지역갈등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이어진 서북차별에 비하면 매우 짧은 역사다. 서북차별을 핵심으로 한 남북지역감정은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개항은 서북인에게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서북인을 차별하던 조선 왕조의 질서는 동요했고 결국 일본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가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자 새로운 가치와 제도가 물밀 듯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울에 세워진 근대 교육시설들에 버금가는 대성학교나 숭실전문학교가 다른 곳도 아닌 평양에 들어선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독교와 신학문을 흡수한 서북인의 활발한 활동은 기호지방 엘리트들에게 경계심을 품게 하였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그는 1929년 서울의 명문가에서 처음으로 평양 출신 사위를 맞아들이면서 ‘조롱과 비난의 표적’이 될까 우려하였다. 반대로 서북인은 평북 출신의 민족주의 지도자 이승훈이 1930년 사망하자 그보다 3년 앞서 사회장을 치른 ‘이상재의 경우와 비교해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치러지게 신경 쓸 만큼 기호인을 의식하였다.

해외의 독립운동에서도 기호인과 서북인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안창호일기에 따르면, 1921년 2월 이동녕, 이시영, 신익회가 와서 자신들이 보좌할 테니 국무총리를 맡으라고 하자, 안창호는 당신들이 한편으로 권하면서 또 한편으로 ‘악선전’했으며, ‘기호 청년이 와서 또 악선전을 계속’하니 믿을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하였다. 또 이동녕은 1924년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이 면직되자 대통령직 승계를 거부하였다. 이에 황해도 출신의 박은식이 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자 ‘상해 의정원에서 협잡 난류배 13인이 기호양반 이동녕 등을 내쫓고 평안도 놈 박은식 등을 불러들여 정부를 만들었으니 이는 평안도 놈의 정부’라고 비난한 사람도 있었다.

안창호가 임시정부에서 노동국총판이란 직책을 원했던 이유도 ‘지방열’로 제살깎기가 더 확대될 수 있어서였다. 그는 1920년 독립전쟁을 준비할 때도 지방열은 없다며 ‘전 국민을 조직적으로 통일’하는 일을 6대 과제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 호남차별과 민주주의 왜곡, 동서갈등

해방 후의 분단과 좌우대결, 한국전쟁을 거치며 계급과 이념 갈등은 폭력적으로 정리되었다. 지역감정의 남북 구도 역시 사라졌다. 1963년 대통령선거 때까지도 계층, 이념, 지역갈등은 큰 영향력이 없었다.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 유권자는 박정희 후보에게, 중부지방 유권자는 윤보선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주었다. ‘남여북야’ 현상이다. 특히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에게 총 15만표 차이로 겨우 이겼는데, 호남 유권자는 박정희 후보에게 약 35만표를 더 주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호남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경제정책은 구미·울산·포항·마산에 대규모 공단을 조성하는 등 영남에 편중되었다. 호남에는 이렇다 할 공단 하나 없었다. 호남정유(현 GS칼텍스) 등 세 개의 공장뿐이었다. 인재등용도 박정희 정권 18년간 장차관의 32.3%, 국무총리와 중앙정보부장 등 권력 핵심부의 40.7%가 영남 출신일 만큼 편중되었다.

편중된 정책은 선거 때 표출된 정치적 지역주의로 합법이란 탈을 쓸 수 있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은 영남의 박정희 후보와 호남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였다. 박정희들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며, ‘이번 선거를 백제·신라의 싸움이라고 해서 전라도 사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우리도 똘똘 뭉치자’는 의미구조를 만들어 영남을 단단히 묶고 전국의 반호남 세력을 결집하고자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조작하고 동원했다. ‘TK정서’라는 특수 언어도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유신독재로 보장된 영남패권주의는 대한민국의 사회여론을 호남차별에 근간을 둔 동서지역감정으로 확장해갔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는 시민군을 폭도로 몰며 지역감정을 극단적으로 악화시켜 호남을 고립시켰다. 이어 집권한 전두환은 장차관의 44.4%, 권력 핵심부의 48.4%를 영남 출신으로 채울 만큼 영남패권주의를 더 강화했다. 그런데도 영호남 지역감정은 체육관 대통령 선거제와 국회의원 중선거구제 실시로 1987년까지 한동안 폭발할 수 없었다. 1986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때 일어난 충돌은 분출구를 찾지 못한 지역감정이 우연한 기회에 우회로를 따라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었다.

1987년 6·10민주항쟁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다. 이후 정치적 지역주의는 보스 중심의 패거리정치와 지역정당을 중심으로 치러진 선거 때마다 지역 연고지별 투표 현상이 크게 나타나며 고착화했다. 더구나 정당들이 계층, 이념에 기반을 두지 않은 데다 강한 헤게모니를 갖고 서울에 집중해 있던 냉전적이고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으로 인해 한국 사회는 선거를 거듭할수록 서울, 곧 중앙으로 초집중화하는 흐름이 강화되었다. 영호남 갈등이 서울쟁탈전으로까지 확전된 것이다. 여기에다 일부 개신교 집단의 반공주의 색깔론 공세가 21세기 들어 거세지면서 이념갈등이 지역갈등과 중첩되어 나타났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은 빨갱이라는 억측이 동서갈등과 남남갈등의 접점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사회민주화와 남북 개선, 지역갈등 해소

다른 한편에서 민주화는 지역갈등의 확장적 견고화를 완화하고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호남권에 기반을 둔 정당이 국가를 책임질 때, 경제편차와 인사편중에 따른 푸대접론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행정수도를 이전하고 혁신도시를 만들어 초집중화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남북한 긴장관계의 완화가 남남갈등을 풀어가는 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해갔다. 광주와 대구는 2013년 달빛동맹을 체결하고 지자체 간 협력을 지속해왔다.

그런데도 지역감정은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다. 2022년 대통령선거와 지방자치선거의 결과가 이를 말해준다. 왜 그럴까. 매우 복합적이지만 한 가지는 명확하다. 자기 변신을 동반하지 않은 것이다.

민주당은 동진정책을, 국민의힘은 서진정책을 각각 내세우며 상대 정당의 지역 기반에 뿌리를 내리려 노력해왔다. 두 정당의 정책은 집토끼를 그대로 두고 산토끼를 잡겠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또 자신의 집토끼 지역에서 지역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적도 없었다. 지역정치를 독점하여 중앙에서의 기득권을 지키며 팽창만 하겠다는 이치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대책인 것이다.

일방적 진출 정책은 아무리 교류를 많이 확대하고 물리적 공간을 공유하더라도 집단 간 신뢰를 증진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오히려 상대방을 믿고 자신을 노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교류만이 상호 부정적 인식과 고정관념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거버넌스가 학술 및 문화연구, 환경 및 생태, 보건의료 분야일 것이다. 꾸준한 자기 변신이 미시적 완화책이라면, 한국적 중앙집권화와 분단구조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동서분열을 해소하는 우호적인 환경을 만드는 노력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동서독의 긴장을 완화하고 헬싱키협정을 체결하여 지역안보를 확립하는 한편에서, 서서(西西)갈등을 민주적 사회운영과 시민사회 역량으로 극복한 1970년대 서독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한국근현대사를 동아시아사에 접목하여 연구하며 현재를 고민하고 있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한국역사학의 전환>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과 일본의 제국운영> 등을 간행했다. 저서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이외에 공저로 <용산기지의 역사> <분단의 두 얼굴>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등이 있다.

신주백 역사학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