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 이게 다 ○○○ 때문이다

이호준 기자 입력 2022. 6.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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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김태년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부동산 폭등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누적된 부동산 부양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던 때였다. ‘이게 다 우리 탓은 아닌데’라는 억울함을 토로한 것이었겠지만, 집권 4년차 여당 원내대표가 전전 정부까지 들먹인 것은 무리수였다는 지적이 많았다. 범여권에서조차 “국민 반발이 커지니까 불만을 엉뚱한 데로 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여당 대표가 불러낸 ‘전·전전 정부 책임론’은 그동안 당신들은 뭘 했느냐는 여당 무능론에 오히려 불을 지폈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23번이나 쏟아낸 뒤여서 더욱 그랬다.

이호준 경제부 차장

처음에 정치적 수사 정도로 치부됐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책임론’은 각료들까지 가세하더니,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폭등 대응 매뉴얼’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국토부 장관은 부동산 정책 대응 실패를 추궁하는 질의에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가격이 안정된 것은 노무현 정부 때 만든 규제 때문”이라며 편을 갈랐고, 부총리는 “박근혜 정부 때의 이런 조치(부동산 3법)가 부동산 가격에 누적돼 영향을 미쳤다”고 답하기도 했다. 당시 부동산 시장 폭등은 저금리, 일시적 공급 가뭄, 규제 중심 부동산 정책 등이 빚어낸 복합적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이런 설명이 복잡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공세로 전환해 실책을 덮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게 다 ○○○ 때문이다’를 꺼내드는 악수를 뒀다.

정치권의 본능일까. 길 가다 넘어져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역대급 밈(meme)을 탄생시킨 정치권의 네 탓 공방은, 지난 5년 “이명박·박근혜 때문이다”를 지나, “문재인 때문이다”로 기출변형을 반복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표 대선 공약인 ‘병사 월급 200만원’이 무산되자, 여당에서는 당장 “문재인 정부가 남긴 적자재정의 세부사항을 보고 내린 고육지책”이라는 변명부터 나왔다. 부동산 시장 정상화나 공공부문 개혁을 이야기할 때도 “전 정부 5년간”이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추경호 부총리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전기요금 인상의 불가피성을 말하면서 “전기요금 인상요인이 누적된 것은 지난 5년 동안 잘못된 에너지 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한 것인데, 좀 더 들여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원전 폐기 정책을 추진했지만 그간 국내 원전은 기존 수급 계획에 따라 계속 늘고 있다. 신고리 4·5호기 등의 준공 시점이 1~2년가량 늦어지긴 했지만, 이를 글로벌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가운데 전기요금 인상의 주요 이유로 꼽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국내에는 이미 20기가 넘는 원전이 가동 중이다.

문재인 정부의 원전 폐기 정책이 중장기 에너지 수급 전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별개 문제로 깊이 있게 논의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기요금을 올리긴 올려야 하는데 은근슬쩍 “이게 다 ○○○ 때문”이라는 식은 곤란하다.

정권이 적어도 한번은 연장된다는 정치권의 ‘10년 주기설’은 지난 대선을 거치며 깨졌다. 현 정부도 당장 5년 뒤 “이게 다 ○○○ 때문이다”라는 밈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솔직히 “○○○ 때문” 시리즈는 이제 좀 따분하고 식상하지 않은가?

이호준 경제부 차장 hj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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