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만 논설위원이 간다] '갈라파고스' 공무원 시험이 공시낭인 부추긴다

윤석만 2022. 6. 28. 00: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간 호환성 없는 공시 문제


윤석만 논설위원
그 많던 공시생은 모두 어디 갔을까. 2011년 68.7대 1로 정점을 찍은 9급 국가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올해 22.5대 1로 쪼그라들었다. 2000년(22.7대 1)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동안 공시 열기는 안정된 직장을 구하려는 청년들로 매우 뜨거웠다. 청년들의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열풍은 더욱 거셌다.

그러나 청년 취업난은 개선된 게 없이 공시 열기만 수그러들었다. 그 이유는 뭘까. 우수 인재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려 사회적 비효율이 심화된다는 비판이 있던 것을 감안하면 긍정적 변화로도 읽힌다. 하지만 여전히 전체 공시생이 수십만 명에 이르고, 95% 이상 탈락하는 현실에서 ‘공시낭인’ 현상은 심각한 사회 문제다.

특히 9급 공무원 시험은 별도의 국어·영어·한국사 시험을 치러야 한다. 직무적성 검사나 공인인증 시험처럼 민간기업의 입사전형과 호환되지 않아 실패할 경우 데미지가 크다. 탈락한 대다수는 평균 2~3년의 수험기간을 공으로 날린다. 이런 문제가 십수년간 누적되면서 공시에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늘고 있다.

「 20대 비정규직 4년새 33%→40%
9급 경쟁률 급락, 올해 22.5대 1
“공시 준비하다 민간 취업 어려워”
“인증시험 도입 등 호환성 높여야”

노량진 떠나는 공시생들

20일 정오쯤 서울 노량진의 컵밥거리는 공시생 급감과 코로나19의 여파로 매우 한산한 모습이었다. 윤석만 기자

20일 오전 11시 50분쯤 서울 노량진의 컵밥거리. 수년 전만 해도 공시생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이곳은 매우 한적했다. 23개 점포 중 문을 연 곳은 10곳에 불과했고, 30분이 지나도록 점포당 7~8명의 손님만 다녀갔다. 한 컵밥집 주인은 “몇 년 전만 해도 하루 300명씩 되던 손님이 지금은 3분의 1도 안 된다”고 했다.

5년째 인쇄소를 운영중인 신모씨는 “처음엔 20만원을 넘던 하루 매출이 요즘은 5만원에 불과하다”며 “공무원 준비생들이 80%는 감소한 것 같다”고 했다. 24년째 서점을 운영중인 제일서점 대표 정모씨도 “3~4년 전과 비교해 공무원 시험 서적 매출 비중이 70%에서 40%로 줄었다”고 했다.

노량진에 한파가 찾아온 데에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비대면 강의가 늘어난 점이 한몫했다. 메가스터디 같은 온라인 강의 수강생이 급증했다. 저출산 여파로 청년 인구가 줄었기 때문이란 주장도 있다. 하지만 올해 9급 공무원 필기시험 합격자 평균 연령(29.3세)이 속한 25~34세 인구는 2017년 659만명에서 2021년 675만명으로 소폭 늘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본질적 원인은 공시생 수가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5672명을 뽑는 9급 국가공무원 시험에 12만 7643명이 몰려 22.5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비슷한 인원을 선발했던 지난해(15만 6311명)보다 3만명이나 감소했다.

보통 경제가 어렵고 취업난이 심할수록 공무원을 선호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후 공시 열풍이 거셌던 이유다. 그러나 지난해 청년실업률(7.8%)은 2008년(7.1%)보다 나아진 게 없다. 2017년(9.8%) 정점을 찍고 내려오긴 했지만, 비정규직 비율은 오히려 늘었다. 2017~2021년 20대 33.1% → 40%, 30대 20.6% → 23%로 고용의 질은 악화했다.

결국 취업난이 해소돼 공시 열기가 식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MZ세대의 성향과 맞지 않는 권위적인 문화와 낮은 처우가 매력을 떨어뜨린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현상의 이면에는 또 다른 심각한 이유가 숨어 있다. 95%가 넘는 탈락률과 이로 인한 ‘공시 낭인’ 누적이 공무원 시험 기피 현상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탈락시키는 게 목적인 시험

노량진에서 만난 9급 공시생 최석원(30)씨는 “공무원 시험공부가 민간 분야 취업에 도움이 안 되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최 씨는 증권사에서 근무하다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어 공시에 도전했다. 그는 “9급 공통과목인 국어·영어·한국사는 별도의 시험을 치르기 때문에 여기에만 맞는 공부를 따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비수도권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박모(32)씨는 4년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현재는 사설학원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며 사무보조 일을 하고 있다. 박 씨는 “공시에 매달린 시간과 투자한 돈이 아깝다”며 “더욱 답답한 것은 그때 공부한 지식들을 일반 기업에 취업할 때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9급 공무원 시험은 공통과목 3개와 직렬별 전문과목 2개 등 총 5과목 평균(만점 100점)으로 당락을 가른다. 지난해까지는 전문과목 대신 수학·사회·과학 등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올해부터 없어졌다. 세무직 합격자 중 세법 등 전문과목을 하나도 택하지 않은 비율이 65.5%(2018년)에 달하는 등 전문성 없는 공무원을 양산한다는 비판이 일면서다.

일반행정직 기준 합격선은 90점대 초반이다. 과목당 20문제씩 총 100문제를 100분 동안 풀어야 한다. 김성열 경남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학회장)는 “올해 9급 국어·영어 문제지를 풀어봤더니 모두 90점을 맞았다”며 “한국사는 너무 어려워 엄두도 못 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을 지낸 평가 분야 전문가다.

김 교수는 5% 미만의 낮은 합격률을 보이는 시험은 선발 목적만 있어선 안 된다고 했다. “95%의 불합격자들이 다른 진로를 택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공시생이 공부하는 내용 자체에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한국사 시험의 경우 평가 목적이 암기력 이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약사 출신의 박한슬(31) 작가는 “9급 공무원 시험 응시자의 3분의 1이 30대 이상”이라며 “한창 경제활동을 해야 할 청년들이 합격 기약도 없이 오직 ‘떨어뜨리려는 시험’에 묶여 있다”고 비판했다. 올해 9급 공무원 시험 필기시험 합격자 중 30대는 29.3%였다. 40대도 6.2%나 됐다.

공무원 역량 평가 시험 필요

9급 한국사 문제지를 분석한 종로학원 임성호 대표는 “문제 유형이 중고등학교 내신에서 출제되는 단순 암기 형태인데, 지엽적 지식을 물어 당락을 가른다”며 “이런 문제가 공무원의 자질과 역량을 평가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2018년엔 고려시대 역사서 4개를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문제가 출제돼 논란이 일었다. 이중 고금록(1284년)과 제왕운기(1287년)의 편찬 시기가 3년밖에 차이 나지 않아서다. 당시 한국사 스타강사인 최태성씨는 “연도 문제 그것도 차이는 겨우 3년, 한국사 교육을 왜곡하는 저질 문제”라고 비판했다.

국어 시험도 다르지 않다. 이만기 유웨이교육평가연구소장은 “수능만 해도 주어진 문제 상황을 추리·분석하고 해결하는 고등사고능력을 측정하는데, 국가 운영 인력을 뽑는 시험에서 가장 기본적인 어휘력과 문해력만 본다는 게 놀랍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몇몇의 경우 단순 암기 내용을 테스트하는 아주 수준 낮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성열 교수는 “별도 시험 대신 토익이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처럼 공기업과 민간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증 시험으로 대체하면, 설령 실패한다 해도 수험기간이 아깝게만 느껴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5급·7급 공무원 채용에선 영어·한국사를 공인인증 시험으로 대체했다. 수험생의 비용 부담을 고려해 유효기간도 2년(토익 기준)에서 5년으로 연장해 적용중이다.

2018년 7급 공무원 시험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도입 결정을 주도했던 김판석 전 인사혁신처장은 “공무원 시험과 민간 시험의 호환성을 높여야만 공시생들이 다른 영역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다”며 “9급도 7급처럼 과목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9급의 경우 응시인원이 훨씬 많기 때문에 비용 문제가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어의 경우 5급에서 시작해 지난해부터 7급까지 적용 중인 공직적격성평가(PSAT)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다. PSAT는 단순 암기 지식이 아닌 이해력과 추론·분석 능력 등 종합 사고력을 평가하는 시험으로 실제 직무수행 역량과 연관이 높다. 이만기 소장은 “PSAT는 민간 기업과 공공기관의 적성검사·직업기초능력평가와 비슷해 호환성이 높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인사혁신처 관계자는 “고교 졸업생에게도 열려 있는 시험이란 측면에서 (개편을)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위 공무원을 뽑는 시험인데 인증시험으로 대체해 난도가 높아지면 논란이 생길 수 있고, 수험생 입장에서 비용 발생의 문제도 있다”고 해명했다.

윤석만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