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서적 번역하며 기후위기 공부..남극 빙붕 붕괴는 현실의 우리 일"
‘얼음에 남은 지문’ 함께 읽으며
과거·현재·미래의 변화 탐구
인간에 의한 온난화 과정 이해
번역, 단순 독서보다 식견 넓혀
“<얼음에 남은 지문>을 함께 번역하면서 남극의 거대 빙붕(氷棚·거대한 얼음덩어리)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내용을 봤는데, 실제로 뉴스에서 빙붕 붕괴 소식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책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경고한 내용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구나’ 실감이 들었죠.”
서울 혜화여고 지구과학 담당 이용준 교사(58)와 학생들은 2017년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다룬 해외 서적을 골라 함께 읽고, 번역하는 방식의 세미나를 진행하기로 했다. 영문 서적을 번역하면서 기후위기에 대해 공부해보자는 이 교사의 제안으로 고른 책이 바로 데이비드 아처 시카고대 지구물리학과 교수가 쓴 <얼음에 남은 지문>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번역 모임은 자율 동아리 형태로 2년여 동안 활동을 이어갔다. 2017년부터 두 해 동안 20명 정도의 학생이 거쳐간 이 동아리 회원들은 각자 10~20쪽씩 번역을 맡았다.
이 교사는 지난 24일 인터뷰에서 <얼음에 남은 지문>(원제 The long thaw)을 번역서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기후변화에 대해 다룬 책의 대부분이 현재 일어나는 현상 위주인데 이 책은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기후변화를 살펴봤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며 “지구과학 교과 과정과도 부합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밝혔다.
<얼음에 남은 지문>의 내용 가운데 교사와 학생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남극 빙붕 붕괴에 대한 것이었다. 빙붕은 남극 대륙과 이어진 상태로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다. 남극 빙하가 바다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장벽 역할을 한다.
이 교사는 “앞으로 빙붕이 예상보다 더 빨리 파괴되고, 남극 빙하가 더 빨리 녹아내릴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며 “크레바스가 만들어지고, 그 사이로 물이 들어가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 더 빨리 빙붕이 미끄러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레바스는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을 뜻한다. 이 부분을 함께 읽었던 학생들은 2019년과 2020년 남극의 거대 빙붕이 붕괴되고 있다는 국내외 보도를 보고 놀랐다고 전했다. 번역을 할 때는 ‘이런 가능성도 있겠구나’ 정도의 느낌이던 내용이 실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 3학년이던 2017~2018년 번역에 참가했던 하채영씨(22)는 “과학서적을 번역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교과서 내용을 넘어서는 내용들을 번역해 보면서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기후변화로 지구의 평균기온이 계속 상승하는 현상에 대해 읽을 때는 ‘그냥 매년 비슷하게 덥겠구나’ 하고 지나쳤다”며 “그런데 2019년 전 세계에 폭염이 나타나고, 국내에서도 심각한 폭염을 겪으면서 번역했던 내용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3 때였던 2017년 책 일부를 번역했던 조예낭씨(23)는 “지구과학 시간에 지구온난화에 대해 배우면서 인간 때문인지, 자연적인 현상인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인위적인 영향으로 온난화가 가속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번역과 이 교사의 감수를 거친 <얼음에 남은 지문>의 원고는 이후 지구과학 분야 전문가인 좌용주 경상대 교수의 손을 거쳐 지난달 출간됐다. 이 교사는 “아이들이 번역해 놓은 내용을 묵혀두기가 아까워서 좌 교수와 의논했고, 다행히 출판사와 연결되면서 출간까지 할 수 있었다”며 “번역하면서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책을 통해 청소년들이 막연하게 알고 있던 기후위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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