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더위 날려 보낼, 수락산·소요산 자락으로 피서기행

2022. 6. 2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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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고을학교는 <의정부·동두천고을> ]

[프레시안 알림]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의 7월, 제87강은 여름 휴가철의 교통정체를 피하여 서울 가까이에 있는 의정부와 동두천고을로 향합니다. 의정부는 수락산에, 동두천은 소요산에 기대고 있어 수려한 계곡을 품고 있고, 그 계곡 주위에는 많은 유적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분명 한여름의 무더위를 시원하게 식혀줄 것입니다. 아침 출발시각도 8시 30분으로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동두천 소요산 심연의 계곡은 오묘하고도 시원한 정취로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 보낸다.Ⓒ동두천시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87강은 2022년 7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8시 30분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합니다. 제87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코스는 서울-수락산자락(반남박씨종가/박세당사랑채/수락동천바위글씨/노강서원/석림사)-부용산자락(신숙주묘/송산사지/정문부장군묘)-점심식사-마차산자락(삼충단)-왕방산자락(동점마을암각문/어유소장군사당)-소요산자락(조선태조행궁터/사패지경계석/자재암)-서울의 순입니다.

▲<의정부·동두천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87강 답사지인 의정부·동두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서울 북부에 이웃한 의정부(議政府)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하다가 지금의 호원동 전좌(殿座)마을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조정 대신들이 이곳까지 와서 정사를 논의하고 태상왕의 윤허를 받았다고 하여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란 관청 명칭을 이곳의 지명으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헌에는 1912년에 등장하는데 그해 5월 28일 공포된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경기도편에 의하면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라는 부락 명칭이 이때부터 생겼습니다.

의정부는 고구려시대는 매성현에, 고려시대는 견주에, 조선시대는 양주에 속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8년엔 양주면이라 칭했고 1942년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해방 후 1963년 의정부시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의정부시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간언하다 죽음을 당한 박태보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되었다.Ⓒ의정부시

의정부에는 도봉산, 수락산, 사패산 등 수려한 산들이 있습니다.
도봉산(739.5m)은 주봉이 자운봉으로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과 나란히 솟아 있고, 북으로 사패산이 연이어 있으며 서울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주봉, 우이암과 서쪽으로 오봉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천축사를 비롯하여 망월사, 쌍룡사, 회룡사 등의 명찰과 60여 개 사찰이 산재해 있습니다. 도봉산의 물줄기는 문사동계곡, 망월사계곡(원도봉계곡), 보문사계곡(무수골), 도봉동계곡, 송추계곡, 오봉계곡, 용어천계곡 등이 있습니다.

수락산(637.7m)은 경기도 의정부시와 서울 노원구,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수목은 울창하지 않으나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깊습니다. 동쪽의 금류계곡은 동봉 김시습의 유적이 있고, 서쪽의 수락계곡은 서계 박세당의 유적이 있습니다.

사패산(552m)은 동쪽으로 수락산, 서남쪽으로 도봉산을 끼고 있으며 도봉산과는 포대능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이에 회룡골계곡이 있습니다. 사패산이란 이름은 선조의 6째 딸인 정휘옹주가 유정량에게 시집갈 때 선조가 하사한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도봉산의 날카로운 암봉과는 대조적으로 정상은 넓은 암장으로 되어 있고 거대한 제단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범골계곡, 안골계곡, 송추계곡의 물줄기를 품고 있습니다.

▲의정부 수락산은 수목은 울창하지 않으나 산세가 수려하고 계곡이 깊다.Ⓒ의정부시

의정부의 물줄기는 중랑천, 부용천, 백석천 등이 있습니다.
중랑천(中浪川)은 양주 불곡산에서 발원하여 의정부 장암동을 거쳐 서울의 물줄기인 청계천, 우이천, 도봉천, 면목천, 방학천 등 13개의 지류를 받아 안고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를 지나 한강에 합류하는 물줄기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중량포(中梁浦)는 일명 속계라고도 하는데, 도성 동쪽 13리 지점에 있으며, 양주 독두천의 하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대동방여전도>에는 의정부에 속하는 중랑천을 두험천으로, 태릉 부근을 속계, 그 하류를 중량포라 표시하였으며, <대동지지>에는 “일명 속계라고도 하는 송계천이 양주 남쪽 40리 부근에서 두험천, 독두천의 두 개천과 합류하여 속계, 중량포, 전곶평 등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는 중량천(中梁川)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랑천으로 바뀐 연원을 살펴보면 이곳이 도봉산의 산줄기와 봉화산이 만나는 경계선으로, 대나무의 잎과 가지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물결에 비유한 죽랑(竹浪)을 소리 나는 대로 쓰다 보니 ‘가운데 물결[中浪]’이란 전혀 의미 없는 이름이 된 것이고, 또 이 하천이 새내 또는 샛강으로 불리게 된 것도 봉황이 새의 일종임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새가 있는 냇물이란 뜻이 되며, 도봉산 아래에서 서원천(書院川)이라고 불린 것도 새의 둥지가 있는 동산이라는 소원천(巢園川)의 발음이 변화한 것이라 합니다. 1911년 일제에 의해 발행된 <경성부지도>에서 중량교(中梁橋)를 중랑교(中浪橋)로 잘못 표기해 놓은 후, 이를 따른 각종 문헌에서 ‘중랑천’이라고 표기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입니다.

부용천(芙蓉川)은 축석고개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민락동 부용산 밑에서 광쟁이개울(민락천)로 들어가 중랑천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의정부시의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으며, 주변의 민락천, 귀락천, 금곡천 등 많은 지류가 유입됩니다. <대동방여전도> 등에서 부용천을 독두천이라 표시하고 있는데, 현재 자금동사무소 뒤에는 독두소(獨逗沼)가 있었으며 부용천의 물과 축석고개의 물이 만나 거북나루까지 흐르던 독개울의 길이가 약 1㎞에 달했다고 하며, <여지도서>에는 “독두천은 홍복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여 용연담을 이루었다가 남쪽으로 흘러 두험천과 합류한다”며 “양주목 둔야면에 독두천교라는 교량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백석천은 양주시 백석동에서 시작하여 의정부동에서 중랑천과 합류된 후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으로, 현재 시청 정문 북쪽에서 곧은골개울[直洞川]과 만나 곧게 흘러 두험소(逗驗沼)에 이르던 물의 방향이 의정부 기차역이 들어섬에 따라 현재의 신시가지로 돌려 흐르게 하여 생긴 개울입니다. 이때 농지가 하천으로 변한 땅 주인들이 한내[恨川]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한내'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커다란 개울, 또는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로 백석천의 규모나 이 하천이 흘러드는 중랑천이 바로 인접해 있는 것과 또 신시가지의 한복판을 흐르는 것을 감안하여 한내의 의미를 벌판의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이라는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습니다.

▲송산사는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 신하의 절개로 은둔하였던 조견, 원선, 이중인, 김주, 김양남, 유천 등 여섯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의정부시

의정부에는 고려 충절지사들의 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의정부 송산동에는 삼귀라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고려가 망하자 조견, 원선, 정구 등 3인은 조선조의 신하가 될 수 없다하여 이곳 삼귀에서 살았는데 세 사람이 함께 들어왔다 하여 삼귀가 됐고, 조견의 호를 따서 송산동이라 부릅니다.

조견은 어려서 승려가 되어 여러 절의 주지를 지내다 30세가 넘어 환속 한 후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가 되어 영남지방에 내려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양왕이 원주로 쫓겨나고 국새가 이성계 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대성통곡하면서 두류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생을 지내려 작정합니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전갈을 보내 큰 벼슬을 줄 터이니 조정에 들어오라고 하나 조견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조견의 형 조준과 함께 청계산에 찾아가 조정에 들어와 줄 것을 당부하였으나, 끝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자 이성계는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개국공신2등 평양군으로 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두 버리고 송산동 삼귀마을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가 임종할 때 자기의 묘비석에 고려관직만 쓰라고 했으나, 자손들이 유언을 어기고 '조선개국공신평성부원군조견지묘'라 새겨 비석을 새웠습니다. 그러자 그날 밤, 뇌성벽력이 내리치면서 '조공지묘' 넉자만 남기고 비석이 모두 부서졌다고 합니다.

원선은 고려 말에 판삼사 좌윤을 지냈는데 고려가 망하자 관복을 벗어던지고 이곳 송산에서 은거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사자를 보내 여러 번 조정에 들어올 것을 권고했으나 그때 마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는 거문고와 퉁소를 다루는 솜씨가 남달리 빼어났는데 조견의 맞은편 동네에 살면서 매일같이 퉁소를 불어 서로의 안부를 전했다고 합니다.

정구는 1377년(우왕 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부령을 지내다 임견미의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던 중 고려가 망하자 이곳 송산동에서 은거했습니다. 조선 초 관직에 오르지 않았지만 1394년(태조 3) 왕명에 따라 <법화경> 4부를 금니로 썼는데, 이로써 예서, 초서, 전서를 잘 썼던 정구의 능력이 높이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원릉의 ‘태조 건원릉 신도비’의 머리글을 직접 전서체로 쓰기도 했습니다. 용현동 효자봉 중턱에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는 사후 343년인 1761년에 건립된 것입니다.

송산사는 조선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의 신하로 절개를 지키며 은둔하였던 조견, 원선, 이중인, 김주, 김양남, 유천 등 여섯 사람의 위패를 모시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사당입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건물이 전부 헐렸다가 옛 터에 위패만을 모시고 삼귀단으로 불리다가 1964년 후손들이 위패석, 제단석, 병풍석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송산사는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소규모 사당 터이나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특이한 북향으로 배치를 한 유적입니다.

신숙주 묘는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비석, 상석, 문인상, 신도비, 한글창제사적비등 각종 석물들이 있습니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자는 범웅, 호는 보한재, 희현당이고 세종 때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였고, 특히 계유정란 이후부터는 조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해동제국기>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박세당 사랑채 앞, 400년 된 은행나무와 그 옆의 시냇물을 따라 세워졌던 궤산정 등은 조선후기 사대부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의정부시

수락산 자락에는 박세당을 비롯한 반남 박씨 유적이 있습니다.
박세당묘역은 석천동 옛집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으며, 봉분은 하나이며 두 부인과 삼위 합장묘입니다. 사랑채는 박세당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학문을 연구했으며 책을 집필했던 곳입니다. 사랑채 앞에 있는 400년 된 은행나무와 그 옆의 시냇물을 따라 세워졌던 궤산정 등이 조선후기 사대부 주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세당은 조선 후기 중농주의 실학자로서 32세 때인 1660년(현종 1)에 문과에 장원한 후 부수찬, 예조참의, 승지를 거처 홍문관교리, 병조좌랑을 역임하는 등 영달의 삶을 살았지만 결국 학문적 신념 때문에 40세에 당쟁에 혐오를 느끼고 관료 생활을 정리한 후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양주 석천동)으로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책 저술과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습니다.

70세에는 중추부 판사로서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예도 얻었지만 1703년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은 것과, 생애의 치적이라 할 수 있는 <사변록(思辨綠)>을 저술하였지만 당대의 통치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한 저서였기 때문에 결국 ‘사문난적’으로 몰려 유배형을 받았으나 그의 아들 박태보가 숙종 때 인현왕후의 폐출에 반대하다가 처형당했던 것이 감안되어 유배되지는 않았지만 그해 가을에 향년 75로 사망했습니다. 저서로는 대학과 중용 등을 쉽게 해석한 <사변록>,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 <서계집> 등이 있으며, 아들과 친척, 제자 등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서첩인 <서계유묵>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노강서원은 1689년(숙종 15)에 인현왕후의 폐위가 부당하다고 간언하다 죽음을 당한 박태보의 뜻을 기리고자 1695년(숙종 21)에 서울 노량진에 처음 건립하였습니다. 조윤벽 등의 간청으로 1697년(숙종 23)에 숙종이 ‘노강’이라고 이름을 지어 새긴 현판을 내렸습니다. 이후 1754년(영조 30)에 다시 지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 이후에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입니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1677년(숙종 3)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689년(숙종 15)에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694년(숙종 20)에 모든 죄를 사면 받고 그의 충절과 학문이 높이 평가되어 영의정의 벼슬과 문열(文烈)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서원을 건립하였습니다. 노량진 노강서원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1969년에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옮기면서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했던 청절사의 터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북관대첩의 명장 정문부 장군의 유적도 있습니다.
정문부 장군의 묘역에는 행적을 담은 신도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석은 북관대첩비를 복제한 것입니다. 정문부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선조21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얼마 후 함경도 북평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서 명천 길주 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하여 관북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습니다. 이때의 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고, 1610년(광해군 2)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인조 때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석림사는 1671년(현종 12년)에 석현화상과 그의 제자 치흠이 창건한 사찰이다.Ⓒ의정부시

의정부에는 유서 깊은 사찰도 많습니다.
망월사(望月寺)는 639년(선덕여왕 8) 해호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의정부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경내에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혜거국사부도’와 조선 후기에 세워진 ‘천봉당태흘탑’을 비롯한 다양한 경기도 지정 문화재가 있습니다.

회룡사(回龍寺)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전설이 깃든 사찰로 창건과 관련하여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에 창건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조선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회룡사오층석탑’과 ‘회룡사석조’가 있으며, 19세기 탱화의 특징을 반영한 ‘회룡사신중도’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회룡사의 북쪽에 있는 석굴암은 백범 김구가 상해로 망명하기 전 피신하였던 은신처이자 해방 후에는 지난 일을 회상하며 자연을 즐겼던 곳입니다. 자연석 3개로 이루어진 석굴암 입구에는 “石窟庵 佛 戊子 仲秋 遊此金九(석굴암 불 무자 중추 유차김구)”가 새겨져 있는데, 석굴암에 들른 김구 선생의 친필을 받아 당시의 언론인 남상도 등이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림사(石林寺)는 1671년(현종 12년)에 석현화상과 그의 제자 치흠이 창건한 사찰인데, 그 당시에는 서계 박세당이 지은 석림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960년대 상인스님과 보각스님이 복원 및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사찰 내에는 석조지장보살입상과 오층석탑 등이 모셔져 있습니다.

성불사는 1894년 흥선대원군의 보덕암 창건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후 화재와 전쟁 등으로 소실되었던 보덕암을 1963년 중건하면서 성불사라 칭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성불사 내에서 출토된 암막새에는 전면에 용이 새겨져 있고, 이면에 포목흔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기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암막새를 통해 성불사가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는데, 용문(龍文)은 왕실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문양이었기 때문입니다.

동두천과 소요산
동두천은 경기도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동쪽은 탑동동이 포천시에 접하며, 서쪽은 상패동이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에 접하고 남쪽은 송내동이 양주시 회천읍 봉양리에 접하며, 북쪽은 하봉암동이 연천군 전곡읍과 접해 있습니다.

동두천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 이어져 있는데 동쪽으로는 국사봉을 주봉으로 왕방산, 해룡산이 둘러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천보산의 회암령에서 서북으로 칠봉산이 솟아 그 지맥이 여러 갈래로 높고 낮은 봉우리를 펼쳐 남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마차산이 에워싸고 북으로 뻗으며 옥녀봉이 북쪽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동북쪽은 높이가 4~5백미터 이상이나 되는 높은 산들로 꽤 험한 산지를 이루며 국사봉 서쪽 산록에는 소요산이 솟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동두천은 고구려시대에는 내을매 또는 내이미라고 불리었는데 <대동지지>는 백제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시대는 757년(경덕왕 16)에 사천으로 변경하여 견성군(현재 포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시대는 1018년(현종 9)에 양주에 예속 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되어 진을 두었고, 그 당시 양주의 속현으로는 견주, 풍양, 사천이 있었으며 목의 34개 방리 중의 하나인 이담이 동두천시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자재암은 645년(선덕여왕 14)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동두천시

동두천에는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던 절신들의 유적이 있습니다.
삼충단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며 단종의 복위에 가담했던 민신, 조극관, 김문기 등 세 충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32년 9월 김문기의 후손 김항권이 양주 유림의 협조를 얻어 호패비를 세우고 해마다 춘추로 종정일을 택해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민신은 호가 둔암(遯菴), 본관은 여흥이며 문종 때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했습니다. 단종 원년 계유정난 때 현릉(顯陵) 비역(碑役)을 감독하던 중 김종서의 일파라 하여 비역소에서 참살 당했습니다. 정조 때 복관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입니다.

김문기는 호가 백촌(百村), 본관은 김령이며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 정언, 함길도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이릅니다.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었는데 영조 때에 가서 복관되었고, 시호는 충의(忠毅)입니다.

조극관은 본관이 양주이며 1414년(태종 14) 문과에 급제한 뒤 1441년(세종 23) 우승지,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451년(문종 1)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우참찬을 지냈으며 단종 원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1453년 계유정란 때 김종서의 일파로 몰려 격살되었습니다.

한편 파주시 법원읍 동문2리 산725번지에도 이들 민신, 김문기, 조극관과 황보인, 김종서, 정분을 단종의 절육신으로 모시고 있는 월계단이 있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행궁지와 어유소 장군 사패지 유적도 있습니다.
태조 행궁지는 허목이 1663년(현종 4)에 지은<소요산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자식들의 골육상잔을 피해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소요산으로 숨어버리는데 태조는 다음해 7월 8일까지 머물다 8월 9일에는 천보산 회암사로 옮겨와 머물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소요산에는 태조 왕궁터가 남아있습니다.

사패지경계석은 조선 초기의 무신인 어유소(魚有沼) 장군이 1488년 국왕인 성종과 함께 어등산에 올라 사냥을 하던 중 날아가는 솔개를 쏘아 맞혀 떨어뜨리자, 어 장군의 뛰어난 궁술에 감탄한 성종이 그에게 현재의 동두천시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인석을 세운 것입니다.

이 문인석은 맞은편 생연초등학교 후문 우측에 있던 또 다른 문인석과 대좌향을 이루고 있다가 지금은 토지소유주의 이전 요구에 따라 자유수호평화박물관으로 이전하여 현재 두개가 나란히 세워져있으며, 일설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복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 양쪽에 세웠다는 설도 있습니다. 사패지는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 왕이 임의로 특별히 하사하는 토지를 말하는데 사전(賜田) 또는 별사전이라고도 합니다.

▲동점마을 암각문은 선조 때 포천 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이 새겼다고 전해진다.Ⓒ동두천시

동두천 동점마을이 우리나라의 중심이라는 암각문이 있습니다.
동점마을 암각문은 선조 때 포천 현감을 지낸 토정 이지함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방위표시가 자연석에 각자 되어 있는데 상하 3줄로 좌로부터 '一二三四'(첫줄), '六七八九'(둘째줄), '黃中元吉'(셋째줄)이 각자 되어 있습니다.

오행에서 一과 六은 물(水), 북(北), 二와 七은 불(火), 남(南)을, 三과 八은 나무(木), 동(東)을, 四와 九는 쇠(金), 서(서)를 각각 의미하며, 황(黃)은 五와 十의 상징으로 흙(土)과 중심[中央]을 뜻합니다. 오행설에서 유래하는 이 암각화는 동점마을이 우리나라의 중심지이면서 가장 좋은 길지로서 잡귀를 물리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입니다.

자재암(自在庵)은 645년(선덕여왕 14)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서 974년(광종 25) 왕명으로 각규대사가 중창했으며, 1153년(의종 7)에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했습니다. 1872년(고종 9)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간의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靈源寺)라 개칭했다가 1907년(순종 원년) 정미의병 때는 이곳이 의병 활동의 근거지였던 탓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으며, 이후 제암화상과 그의 제자 성파 스님이 복원하여 원래 이름인 자재암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폐허가 되어 1961년 대웅전, 1971년에 요사, 1974년에 포교당과 원효대, 1977년에는 삼성각을 각각 건립하였습니다.

자재암에는 보물 제1211호로 지정된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密多心經若疏)> 언해본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판본은 현재 보물 제771호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도서관본과 동일한 책이나 서울대학교본에 없는 전이 붙어있고, 교정인이 찍혀 있으며 보존상태 또한 훨씬 양호합니다. 저지(楮紙) 목판본이며 목판본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것인 듯 표지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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