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어봅시다] '신의 직장'서 툭하면 횡령..직업윤리 무너진 금융권

강길홍 2022. 6. 27.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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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금고를 쌈짓돈처럼 여겨
범행수법도 다양하고 대범해
"한탕주의 만연·기강도 붕괴"

회사 금고를 쌈짓돈처럼 사용하는 금융사 직원들의 '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었다. 은행, 저축은행, 보험, 증권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하루가 멀다시피 횡령 사고가 터져나온다.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신의 직장'으로 꼽히는 금융사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금융감독원(금감원)은 27일 우리은행 서울 한 지점에서 통상적인 범위를 벗어난 8000억원 규모의 외환거래가 지속돼온 정황을 파악하고 수시검사에 착수했다. 우리은행은 이 지점에서 최근 1년 동안 8000억원 가량이 외환거래를 통해 복수의 법인에서 복수의 법인으로 송금된 사실을 내부 감사를 통해 포착, 지난주 금감원에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지점에서 8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외환거래가 이뤄진 것은 통상적인 수준을 벗어난 것이다. 최근 600억원대 횡령 사고로 지탄받았던 우리은행은 또한번 내부통제 시스템의 부실을 의심받고 있다. 다만 이번 외환거래 사고는 아직 범죄 연루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우리은행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수입증빙서류에 근거해 송금업무를 처리했으며, 업무과정에서 고액 현금거래나 의심스럽다고 판단된 거래에 대해서는 관련 법령에 따라 처리했다고 밝혔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현재까지 직원 등이 불법행위에 관여한 정황은 없다"면서 "감독원 조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으며 향후 밝혀지는 사실관계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농협에서는 횡령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날 경기 파주시의 한 지역농협의 직원이 회삿돈 70억원 가량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직원의 횡령은 무려 5년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농협은 전산 검사를 벌이던 중 횡령 사실을 적발해 경찰에 신고했다. 앞서 지난 15일에는 경기 광주시의 한 지역농협에서 자금 출납 업무를 맡은 A씨가 지난 4월께 타인 명의의 계좌로 공금을 송금하는 방식으로 회삿돈 40억원 상당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바 있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구체적인 범행 방법과 횡령 금액은 추후에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직원들의 일탈을 막기 위해 내부 감사를 강화하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최근 금융권의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이 금감원으로부터 받은 '국내 금융업권 임직원 횡령 사건 내역'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 5월까지 금융권에서 횡령한 임직원은 174명에 달했고, 횡령 규모는 무려 1091억8260만원으로 집계됐다.

은행에서 발생한 횡령 사고의 규모가 808억3410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저축은행(146억8040만원), 증권(86억9600만원), 보험(47억1600만원), 카드(2억5600만원) 등 금융권 전반에서 횡령 사건이 벌어졌다. 횡령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2018년 55억7290만원이었던 횡령액은 2021년 152억6580만원, 2022년은 5월 중순까지 687억9760만원에 달했다. 환수액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지난 5년여간 환수된 금액은 127억1160만원으로 환수율은 11.6%에 불과하다. 2017년 53.5%였던 환수율이 지난해에는 24.90%에 그쳤다.

금융사 직원들의 범행은 갈수록 대범해지고 있다. 범행 수법 또한 전통적인 서류 위조는 물론이고 계약자 정보 무단 도용 및 변경, 전산 조작 등 다양해지고 있다. 심지어 삼성생명이나 교보생명, DB손해보험처럼 국내 굴지의 보험사에선 설계사들조차 보험사기에 가담했다.

횡령 직원들은 횡령 자금을 대부분 주식이나 코인 투자, 스포츠 도박 등에 쓰고 있다. 처음 시도한 범죄가 들키지 않은 직원들은 더 대담한 범죄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생계형 범죄가 아닌 '한탕주의'가 범죄의 늪에 빠져들게 만드는 셈이다. 내부적으로 '쉬쉬'하는 분위기 때문에 횡령 사고가 반복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횡령이 벌어져도 회사 신뢰도 추락을 우려한 금융사들이 신고하지 않는 일이 적지 않다"며 "직원에게 횡령 금액을 변제시키거나 사직하게 하는 방식으로 무마하는 일이 잦다"고 귀뜸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명예교수(경제학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한탕주의도 문제지만 금융사 내부 기강과 직업윤리가 무너진 것도 한 요인"이라고 밝혔다.

허술한 내부통제 제도도 문제로 지적된다. 자본시장연구원은 "금융당국이 합리적 수준에서 금융회사가 준수할 수 있는 업권별 내부통제 가이드라인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고 분석했다.

검찰 출신 이복현 금감원장은 횡령 사고에 칼을 들이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이 원장은 최근 "현재 진행 중인 금융사고 검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금융위와 함께 금융사고 예방을 위한 내부통제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하여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의지가 금융가의 오랜 고름을 뽑아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관련기사 12,13면 강길홍기자 slize@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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