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돋보기] 서울 핵심 아파트 잔뜩 생산한 공유수면매립법
공유수면매립법이 뭐예요?
공유수면매립법이라는 법률이 있다. 정확한 명칭은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이다. 이런 ‘이름도 생소한 법률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공유수면매립법은 우리와 아주 밀접한 법률이다. 현재의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은 2010년에 제정된 것이다. 1999년 8월 시행된 공유수면관리법과 1999년 2월 개정공포된 공유수면매립법을 폐지하고 통합해 공유수면 관리 및 매립에 관한 법률이 됐다. 이보다 앞서 1962년 1월에 법률 제986호 공유수면매립법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인 1923년 3월 식민지 수탈 계획의 하나로 진행된 조선산미증산계획의 일환으로 조선공유수면매립령을 제정하여 간척사업을 진행한 바 있다.
공유수면매립사업은 바다나 하천 등 수면을 매립하여 육지화하는 사업을 말한다. 서울시는 1960년 후반부터 한강 연안의 공유수면을 매립했다. 여의도, 반포, 동부이촌동, 흑석동, 압구정동, 구의동에 택지가 생겼다. 잠실도 마찬가지다. 원래 섬이었던 잠실도의 위쪽 물줄기는 신천강이라고 불렀는데 잠실의 매립으로 물줄기가 넓어져 오늘의 강줄기가 되고 섬 남쪽 물줄기인 아래쪽 송파강은 매립되어 일부가 석촌호수로 남았다(서울 역사 답사기 3권, 서울역사편찬원 참고).
동부이촌동 매립사업?
어쨌든 오늘날 서울 주요 지역의 다수 아파트단지는 바로 이 공유수면매립에 의해 조성된 택지다. 먼저 시작된 것은 서부이촌동이다. 1965년 한강철교 좌우 28만㎡(8만5000평)가 매립됐다. 다음 한국수자원공사가 주축이 된 동부이촌동 매립사업은 1969년 6월에 완료됐다. 매립 후 조성된 택지에는 한강맨션을 비롯해 다수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본래 아파트라는 주택 유형은 외국 사례에서는 ‘맨션’을 일컫는 것으로 초창기 서울에 공급된 아파트 역시 ‘아파트’가 아닌 ‘맨션’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1962년 마포아파트가 지어진 바 있지만 이촌동의 한강맨션을 제외하면 대부분 나 홀로 아파트, 소규모 단지로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해당 아파트들은 한 동 또는 소규모 단지임에도 불구하고 한강을 남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입지로 비싼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동부이촌동 일대는 지금도 좋은 주거지이고 가격이 비싼 곳이지만 1974년 지어진 렉스아파트를 재건축하여 2015년 준공한 래미안 첼리투스를 제외하면 도시개발 측면에서는 전반적으로 잠잠한 곳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강맨션 재건축, 이촌현대아파트 리모델링 등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도 한강을 남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곳 일대는 선호도가 높은 주거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비행장이었던 여의도와 공유수면매립
1962년에 제정된 공유수면매립법을 근거로 1967년 12월 여의도 윤중제 공사가 시작됐다. 여의도는 과거 섬이자 너른 백사장이었던 곳이다. 한때는 비행장이기도 했다. 해방 후 중국 등지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 등 주요 인사들이 비행기를 타고 내리는 장면이 옛 TV 자료화면을 통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여의도이자 과거 비행장이었던 여의 섬, 여의도다. 여의도 개발에 앞서 제1 한강교에서 김포공항까지 강변 제방도로 공사가 진행된 바 있다. 1966년의 일이다. 서울 도심에서 김포공항까지 바로 연결되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설치한 것인데 이 과정에서 기존 제방과 새로운 제방도로 사이에 기존에 활용할 수 없던 땅 8만㎡(2만4000평)가 새로 생겼다. 오늘날 한강대교 남단에서 노량진을 거쳐 신길까지 이어진 곳으로 경인선 철도와 한강 사이에 지금도 길쭉하게 생긴 택지로 남아있다. 한강에 제방도로를 만드니 그 옆에 땅이 생기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한강대교 남단에서 흑석동으로 연결되는 축도 강변도로의 설치와 공유수면 매립이 이뤄졌다. 해당 위치는 원불교 소태산기념관과 명수대 현대, 명수대 한강 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착안하여 여의도에도 바깥쪽으로 물을 막고 제방도로를 설치했다. 제방 설치로 그 안쪽의 모래밭 290만㎡(90만 평)의 여의도 땅이 생긴 것이다. 이곳에 시범아파트 등 대규모의 아파트를 설치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준공 50년을 맞았으며 최근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그 외에 여의도 내 다수의 아파트도 재건축 및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다.
반포와 잠실도 공유수면매립법?
반포지구는 1969년 초 건설사 세 곳이 참여해 매립공사 면허를 취득했다. 이후 1970년 7월부터 매립공사를 진행했고 매립된 후 택지는 대한주택공사가 매입하여 반포 일대 주공아파트를 지었다. 이 시절과 그 이후 반포 일대 아파트 가격 상승은 그 후 1기 신도시를 빗대 유행하던 ‘장화 신고 들어가 구두 신고 나온다’는 말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택지 조성 이후 강남, 당시 영동 개발 초기에는 서울이 한강 이북과 서쪽 영등포 일대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그야말로 잠실과 함께 상전벽해한 곳이라 할 만하다.
잠실은 조선 전기까지는 뽕나무 밭이 있던 곳으로 누에치기가 이뤄지던 곳(잠실)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잠실인 잠원동과 연희동의 잠실은 조선 후기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반면 동잠실인 오늘날의 잠실 일대는 조선 후기 무렵엔 백사장이자 섬으로만 남아 있던 곳이다. 그 후 1969년 1월 서울시의 공유수면매립 면허 신청으로 잠실 개발이 시도되었다. 해당 신청은 당시 건설부에서 한 번 반려되었다가 5대 건설사에 사업권을 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1971년 2월 매립 인가를 받아 약 330만㎡(99만 평)을 목표로 매립을 진행했다. 이후 잠실지구 매립지를 포함하여 1130만㎡(340만 평) 일대는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구획정리 사업과 도시계획이 같이 진행되어 잠실 아파트 지구를 이루었고 1990년 초 재건축이 추진되어 5단지를 제외한 1, 2, 3, 4단지가 재건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결국 오늘날의 반포와 잠실도 공유수면매립법의 결과물이다.
부동산의 미래를 묻는데 왜 옛날 이야기를?
서울의 공유수면매립을 통한 택지의 개발은 오늘날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 경위를 떠나 한강을 앞에 두고 개발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파트 지구와 택지의 입지가 한강이라는 조망 한 가지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강을 낀 개발의 입지는 필연적으로 넓은 유역에 걸친 평지라는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1기 신도시에서 신도시라는 용어가 나오기 전 사실상의 첫 신도시라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한강을 중심으로 한 동서의 간선도로와 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교의 설치는 필연적으로 매립지의 교통환경에 좋은 영향을 줬다. 당시에는 미처 예측할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공유수면매립법은 서울의 핵심 아파트를 잔뜩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부동산의 역사, 부동산법의 역사를 따져보는 것은 미래 부동산의 가치를 살펴볼 수 있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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