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15>] '숙성(夙成·이른 성취)'과 '만성(晚成·늦은 성공)'

홍광훈 2022. 6. 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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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의 국학계에서 젊은 나이에 독보적 일가를 이룬 유사배. 사진 위키피디아

“세 해 동안 싸움터 떠돌던 나그네, 오늘은 또 사로잡히는 몸이 됐구나. 가없는 강과 산이 눈물 흘리니, 그 뉘 하늘과 땅이 넓다 하리오! 황천길 가까워짐을 알았음에, 고향 땅 헤어지기가 어려워라. 굳센 넋 돌아오는 날, 망자 부르는 깃발 하늘가에서 보리라(三年羈旅客, 今日又南冠. 無限河山淚, 誰言天地寬! 已知泉路近, 欲別故郷難. 毅魄歸來日, 靈旗空際看).”

‘별운간(別雲間·운간을 떠나며)’이라는 시다. 명 말(明末)의 하완순(夏完淳·1631~47)이 청군(淸軍)의 포로로 끌려가며 지은 것이다. 당시 그는 불과 17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14세 때 여진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자 당대의 명사인 부친 하윤이(夏允彝)와 스승 진자룡(陳子龍)을 따라 붓을 던지고 창을 들었다(投筆從戎). 남방으로 쳐내려온 청군에 항거해 3년간이나 전장을 누비며 분전하다가 결국 포로가 된 뒤 참수당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이 소년은 5세에 오경(五經)을 익히고 7세에 시문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남긴 문집에는 300여 수의 시를 비롯한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이 실려 있다. 양적으로 역대 여느 유수한 시인에 못지않으며, 문학적 성취도 또한 높이 평가된다.

시인과 극작가로서 갑골문(甲骨文)과 고대사에도 조예가 깊었던 궈모뤄(郭沫若·1892~1978)는 하완순의 불꽃 같은 생애를 그린 ‘남관초(南冠草)’라는 극본을 지었으며, 이를 토대로 한 상하이(上海)와 저장(浙江) 일대의 전통극인 월극(越劇)도 유명하다. ‘남관초’란 하완순이 적군에 붙잡힌 뒤 감옥에 있으면서 지은 시집의 이름이며, ‘포로’라는 뜻의 ‘남관’은 춘추시대 초(楚)의 종의(鍾儀)가 진(晋)의 감옥에 구금될 때 남쪽 나라인 초의 관모를 쓰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하완순은 중국 역사상 어린 나이에 크게 이름을 떨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물론 그 말고도 유사한 예가 적지 않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의 재상 감무(甘茂)의 손자 감라(甘羅)는 14세에 최고 직급인 상경(上卿)에 임명됐다고 전해진다. 12세에 실권자 여불위(呂不韋)의 참모가 된 그는 타고난 기지를 발휘해 나라를 위한 여러 가지 공을 세우고, 이로써 역사상 전무후무한 파격적 인사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설화 같은 이 고사는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돼 있다.

춘추시대의 신동 항탁(項橐)은 7세 때 당대의 명사인 공자(孔子) 앞에서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 공자로부터 스승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사기’보다 앞선 사료(史料)인 ‘전국책(戰國策)’에 실려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돼 온 고사다.

동양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역경(易經)’과 ‘노자(老子)’ 두 명저는 왕필(王弼)의 주석이 가장 유명해 오랫동안 권위를 자랑해왔다. 삼국시대 위(魏)에서 활동한 그는 20대 초에 이미 이 두 역작을 완성하고 23세에 병사했다.

청 말(淸末)과 민국시대(民國時代·1912~49)의 경학가(經學家) 유사배(劉師培·1884~1919)는 35세에 요절했지만, 짧은 기간에 이룬 그 학문의 경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흔히 장태염(章太炎), 황간(黃侃) 등과 함께 최고의 ‘국학대사(國學大師)’로 꼽힌다.

전한(前漢) 중기의 곽거병(霍去病)은 황후 위자부(衛子夫)와 대장군 위청(衛靑)의 생질(甥姪)이라는 족벌 관계로 18세 때 무제(武帝)에 의해 장군으로 발탁됐다. 그 뒤 수년간 흉노(匈奴)와 전쟁에서 천부적 군사 재능을 발휘, 누차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그 덕에 약관의 나이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외삼촌 위청과 함께 군사의 최고 직위에 올라 일세를 호령했다. 그러나 ‘풍운을 질타하던(叱咤風雲)’ 젊은 영웅도 병마를 이기지 못해 24세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에 앞서 초한(楚漢) 쟁패기의 항우(項羽)는 20대 중반에 천하의 패왕으로 군림했으며, 용병의 달인 한신(韓信)도 젊은 나이에 대장군이 되고 나중에 초왕(楚王)에까지 봉해졌다. 그러나 이들도 젊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반면, 앞 사례들에 비해 늦게 성공하는 경우도 고금을 통틀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전해진다.

강태공(姜太公)은 늙도록 강가에서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다가 뒤늦게 문왕(文王)을 만나 주(周) 왕조 건설의 주역이 됐다. 춘추시대 중기의 백리해(百里奚)는 장기간의 고난과 시련 끝에 70세에 겨우 진(秦)에 기용돼 목공(穆公)이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비슷한 시기의 공자(公子) 중이(重耳)는 박해를 당해 19년간 각국을 전전하는 유랑생활을 했으나, 60세에 귀국해 정권을 잡고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가 바로 춘추오패 중의 진문공(晋文公)이다.

항우가 20대 초에 거병(擧兵)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반면 유방(劉邦)은 40대가 돼서야 조그만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대결에서는 그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의 아버지로 두 아들과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대열에 드는 소순(蘇洵)은 젊은 시절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아 허송세월하다 27세에 늦은 공부를 시작, 다년간 노력 끝에 대문장가로 성공했다.

만년에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진 위키피디아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데 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만년에야 그 자리에 올랐다. 앞의 두 사람은 그 세력이 당대에 그쳤지만, 그가 수립한 에도 바쿠후(江戶幕府)는 250년이나 정권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찍 성공해 잘 살고 싶다는 염원은 모두의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일찍 성공하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인지는 그 인생 전체를 훑어봐야 알 수 있다. 일찍 성공하면 기고만장(氣高萬丈)한 나머지 뒷날 실패하거나 실패하지 않더라도 남의 시샘으로 해를 당할 수가 있고, 재승덕박(才勝德薄)의 지경에 이르러 인망을 잃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반면에 늦게 성공하는 경우에는 자신의 과거를 미루어 남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는 인격이 갖춰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망도 얻게 된다.

특히 학문 분야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친 인고의 축적이 있어야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작은 재능으로 단기간에 얻은 얄팍한 실력을 뽐내봐야 남의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앞에 언급한 황간은 생전에 50세 이전에는 절대로 저서를 쓰지 않겠다고 누누이 다짐한 것으로 유명하다. 학문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책을 내면 결과적으로 남에게 그릇된 지식을 전달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묵힌 술일수록 맛과 향이 더 진해지듯 학문 또한 그렇다. 물론 문학과 예술 등 재능과 개성이 중시되는 분야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므로 예외다.

지난 5월 말 세상을 떠난 왕년의 미남 배우 신일룡(申一龍)씨는 대학 시절 스타가 돼 대종상의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1970~80년대를 주름잡았다. 이와 함께 봉제업과 외식업 등 여러 사업을 벌여 큰돈을 벌었다.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그는 40대 후반에 카지노 사업에 손을 댔다가 전 재산을 잃었다. 오랜 방황 끝에 소박한 호두파이 가게를 열어 즐거운 마음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더니 홀연 74년의 삶을 마쳤다. 신씨는 과거 “젊어서 일찍 성공했기 때문에 세상 어려운 줄 모르고 자만하다가 큰 실패를 당했다”고 술회했다.

인생 초반에 일찍 성공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해나가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다. 그럴 바엔 차라리 늦게 성공해 과거의 고생을 거울삼아 이를 잘 지켜냄으로써 인생을 무난하게 마무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므로 일찍 성공했다고 너무 좋아할 일도 아니고 한창나이에 남처럼 성공 못했다고 그렇게 조바심할 것도 없다. 뒤늦게라도 성공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하면서 분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은 신앙뿐 아니라 세속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 홍광훈
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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