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53>] 서로의 고독에 간섭하지 않고 그저 지켜봐 주는 '고독의 시대'

박혜진 2022. 6. 27. 18:2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진 셔터스톡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해방클럽이라는 수상한 모임이 등장한다. 사내 동호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는커녕 협조조차 안 하는 탓에 동호회 관리부서의 감시와 압박을 받고 있던 아웃사이더 세 사람이 마지못해 결성한 모임이다. 클럽 이름을 듣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묻는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고. 실은 이들도 알지 못한다.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것인지. 자신들이 어디에 갇혀 있기에 이렇게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다만 합의된 강령은 있다. 행복한 척하지 않기. 불행한 척하지 않기. 정직하게 보기. 무엇을 정직하게 본다는 것일까? 

이들이 맨 처음 모인 날을 그린 에피소드를 잊을 수가 없다. 카페에 모인 세 사람은 창가 1인용 좌석에 나란히 앉는다. 마주 보지 않고 각자 앞을 보며 이야기하는데, 누구도 웃지 않고 누구도 상대의 말에 이래라저래라, 이렇다 저렇다 덧붙이지 않았다. 그 무심한 거리가 좋았다. 다만 상대가 저런 모양의 마음으로 고독하다는 것을 바라봐 주는 거리. 우리가 같이 외롭고 쓸쓸한 트랙을 돌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거리. 서로의 고독에 간섭하지 않고 그저 지켜봐 주는 것은 고독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대의 새로운 윤리 강령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해방클럽 회원들이 비하도 미화도 없이 정직하게 보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고독한 ‘나’였으리라.

박지영 소설 ‘고독사 워크숍’도 각종 1인용 밴드의 이름이 나열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인용 밴드 이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충고는 됐고요 조언도 사양 밴드, 그러거나 말거나 밴드, 쓸데없는 자격증 수집가 밴드, 내 안의 옹졸한 마음에 관대하고 자비롭기로 약속하는 밴드, 회피형 인간으로 사는 도피형 인간 밴드, 스몰 토크를 피하는 법에 관한 스물일곱 개 전략 회의 밴드, 좋은 것 앞에서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하는 밴드⋯. 내가 이 워크숍 참가자라면 어떤 1인용 밴드를 만들었을까.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긴 하다. 내 발등 찍는 나도 자비롭게 봐주기 밴드. 내가 찍은 내 발등의 역사만 늘어놓아도 책 한 권은 문제없이 완성할 수 있다. 그런 나를 원망 없이 바라봐 주는 것이 이 밴드의 목적이겠다. 

본디 밴드의 단위는 한 사람이 아니다. 공통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위해 밴드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시점으로 바라보면 1인용 밴드는 완전한 모순이다. 그 모순을 해소해 주는 것이 ‘나와 함께하는 나의 밴드’라는 개념일 것이다. 1인용 밴드는 혼자인 나와 함께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숱한 ‘나’들과 함께하는 밴드. 그럼 타인은? 타인은 지켜보는 존재다. 나와 연결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존재로 옆에 있어 준다. 나도 뛰고 있으니 너도 계속 뛰어. 혼자 뛰고 있지만 같이 뛰고 있는 거야. 

‘고독사 워크숍’은 심야코인세탁소라는 업체가 운영하는 일종의 채널 공유 사이트다. 이들이 제공하는 고독사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회원으로 가입한, 저마다 고독한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고독 채널을 만들고, 그 채널에 시시한 일상들을 업로드한다. 그러면서 달라지는 게 뭐냐고? 자신의 고독과 친해질 수 있다. ‘어설프게 수상하고 애매하게 한심한 고독사 모임’이지만 자신의 고독과 한층 친밀해지고 타인의 고독을 지켜봐 준다는 점에서 보면 수상하고 한심하기만 한 사업 모델은 아닌 것이다. 

한편 이 책은 고독사 워크숍에 참여하게 된 열세 명의 사연을 옴니버스식으로 보여 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고독의 유전자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보여 주는 가운데 고독‘사’ 이야기를 고독‘생’ 이야기로 바꾼다는 점에서 효과 만점 워크숍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1인용 밴드 이름이 나열되는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밴드 이름을 많은 사람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예전에도 틀린 적이 있고, 그러니 뭘 망설이고 있나요”는 사실 웨이비 그레이비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 묘비명 속 한 문장이다. 물론 진짜 묘비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벤앤제리스 아이스크림 사이트에는 단종된 맛 아이스크림의 묘비명 문구들이 있고, 그중 웨이비 그레이비 맛 아이스크림 묘비명에 이 같은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맛 아이스크림이지만 우리는 예전에도 틀린 적이 있으므로 이 죽음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말. 단종된 맛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 당신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고독사가 비참한 종말을 상기하는 차가운 단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만의 고독을 가꾸고 나의 고독과 친해지다 보면, 그러니까 고독생의 프로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핑크빛 고독사를 꿈꾸는 것도 안녕한 고독사를 만드는 것도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매일 시작할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말이다.

plus point

박지영

사진 조선일보 DB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고 장편소설 ‘지나치게 사적인 그의 월요일’로 2013년 조선일보 판타지문학상을 받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판타지한 공간과 섬세한 심리 표현으로 삶에 대한 회한과 불안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가운데 ‘쇼 비즈니스’로 점철된 현대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독사 워크숍’은 고독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비즈니스로, 우리 사회를 체감하는 작가의 예민하고 개성적인 촉수가 다시 한번 확인된 작품이다.


▒ 박혜진
조선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 평론가상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