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대문 열고 '함마니, 안녕' 하면 반겨주실 것 같아요"

한겨레 2022. 6. 27.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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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김향심님은 1924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 땅에서 98년을 살다 지난 4월 완도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잠드셨다.

할머니의 묘소에 다녀왔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 할머니가 잠든 그곳에는 지난 어버이날 엄마가 심어 놓은, 가물어 잎이 다 말라버린 카네이션이 있었다 . 50년 넘도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친딸들보다 더 슬퍼했고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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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가신이의 발자취] 고 김향심님께 올리는 손녀의 글
2021년 9월 전남 완도 고향집에서 할머니(왼쪽부터), 필자와 아들, 여동생 아들이 함께했다. 왼쪽 구석에 할머니의 의자가 보인다. 마은아씨 제공

고향집 고개를 넘어가면 대문 앞 의자에 앉아 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거동이 불편해진 뒤 할머니는 그 의자를 방 안에 두고, 당신을 평생 지켜보아 온 친구 같은 바다를 보며,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속마음을 바다에 털어놓는 것만 같았다 .

할머니 김향심님은 1924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평생 고향 땅에서 98년을 살다 지난 4월 완도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잠드셨다. 그새 시간이 흘러 할머니 49 재도 지냈다 . 하지만 지금 도 할머니가 그 방 그 의자에 앉아 당신이 가장 예뻐하던 손녀를 두 팔 벌려 반겨줄 것만 같다 . 방문을 열면 24 시간 켜져 있는 티브이 앞에 주무시는 할머니가 계실 것만 같다 .

입관식에서 마주한 할머니는 분홍빛 입술을 한 너무도 곱고 편안한 모습이었고 내가 ' 함마니 ~~ 나 왔어라 ' 하면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만 같았다 . 장례지도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할머니 얼굴을 만져보았다 . 생전 고았던 피부 그대로 너무도 부드러웠고 차가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

할머니의 묘소에 다녀왔지만 아직도 할머니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 할머니가 잠든 그곳에는 지난 어버이날 엄마가 심어 놓은, 가물어 잎이 다 말라버린 카네이션이 있었다 . 50년 넘도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온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친딸들보다 더 슬퍼했고 힘들어했다.

할머니는 올 초 집 앞에서 넘어지면서 거동이 불편해지셨고 엄마가 잠시 나갔다 오는 사이 이불에 배변을 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 할머니는 스스로 집 근처 요양원에 들어가시기로 했다 . 더는 며느리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며느리 도 허리가 좋지 않은, 손주를 둔 ‘할머니 '란 사실을 할머니는 너무도 잘 알았다 . 입 버릇처럼 항상 ‘며느리 미안해서라도 빨리 죽어야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

돌아가시기 이틀 전 할머니가 식사를 잘 못 하신다고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단다 . 팔순이 넘은 아빠와 곧 팔순이 되는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1 층에 진료실이 있는 병원을 찾아 인근 도시까지 헤맸다고 했다 . 두 분은 할머니를 업고 가서, 기어이 수액을 맞게 하셨다고, 너희들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고, 훗날 얘기했다 .

할머니 김향심씨의 묘소에서 바라다 보이는 완도 앞바다의 풍광. 마은아씨 제공

친정엄마를 먼저 떠나보낸 엄마는 할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듯 요양원에서 모셔오겠다며 할머니 방에 빠짝 말려 뽀송뽀송한 이불을 펴놓고 다음 날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선잠이 들었다 . 깊은 잠이 들기도 전에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고, 5 분 거리를 엄마가 뛰어가 보기도 전에 할머니는 그렇게 주무시는 듯 길고 길었던 백 세의 고단함을 내려놓았다 .

주인을 잃어버린 그 이부자리를 다시 정리할 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 평생을 모시다 그 잠깐을 못 참고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다며 엄마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 상을 치르고 손녀들도 다 떠난 바로 다음 날에도 엄마는 홀로 할머니에게 다녀왔다 . 할머니가 생전에 하루 3 잔을 마실 만큼 좋아했던 믹스커피를 타서 올리고 왔다고 했다 .

2004년 7월 고향 완도에서 가까운 해남타워로 할머니(앞줄 오른쪽)를 모시고 가족 나들이 갔을 때. 윗줄 왼쪽 부친(마광남)과 필자. 마은아씨 제공

나에게 할머니는 더울 때는 그늘을 주고 눈비가 오면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처마’ 같은 존재였다 .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이후 30년 넘게 할머니의 ‘처마’ 는 울 엄마가 아니었을까 싶다 .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빠는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고 한다 .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깊이의 그립고 미안한 마음이겠지 .

나는 유난히도 할머니를 따르고 좋아했다 . 어릴 때부터 할머니 등에 업히는 시간이 좀 많은 편이었다 . 자라서 독립한 뒤 어쩌다 집에 다니러 와서도 엄마보다 먼저 할머니와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주 길었다 .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던지. 엄마가 시샘을 할 정도였다, 둘이 찰싹 붙어 앉아서 오랜 시간 수다를 나눴다 . 그런 할머니가 이제 내 곁에 없다 . 코로나 19 거리두기 라는 핑계로 자주 못 뵌 것이 후회가 되어 자꾸 질책하게 한다 .

우리 집에서 완도까지 6 시간 넘게 걸리지만, 부모님에게는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해본다 .

고양/손녀 마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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