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고 강렬한 몰입의 힘..독일가곡 정수 보여준 연광철
(서울=연합뉴스) 나성인 객원기자 = 지난 26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획 공연 '디어 슈베르트'의 대미를 장식하는 연광철, 선우예권의 '겨울 나그네' 공연이 열렸다.
이번 '디어 슈베르트'는 슈베르트의 실내악 명작과 가곡을 집중적으로 조망한 수준 높은 기획이었다. 엿새에 걸쳐 솔로, 듀오, 트리오, 콰르텟과 퀸텟 등의 실내악, 여기에 가곡 공연이 더해져 슈베르트 음악 세계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디어 슈베르트'의 마지막 공연이 있던 이 날 세종체임버홀의 분위기는 음악으로의 몰입 그 자체였다.
먼저 베이스 연광철은 관록과 기교를 넘어서 거의 구도자적이라 할 만한 진지함으로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그는 바그너 가수이자 바이로이트의 주역 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슈베르트의 연가곡에서도 작곡가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는 해석자의 면모를 보여줬다. 극적인 과장이나 제스처는 거의 없었고, 첫 곡부터 시상과 내면의 상태에 온전히 집중하는 리트(Lied·예술가곡) 가수로 변모해 있었다.
강렬한 몰입의 힘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날 공연은 인터미션 없이 스물네 곡을 한 번에 연주했고, 전날 공연과 달리 번역 자막도 스크린에 띄우지 않은 채 진행됐다. 오로지 한 곡 한 곡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게끔 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휴대전화의 울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주자와 관객들의 집중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됐다. 국내 무대에서는 진귀한 경험이다. 마치 세종체임버홀이 "음악을 듣는 것은 진지한 일"이라고 새겨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가 된 것 같았다.
연광철은 '겨울 나그네' 1부에 해당하는 12곡에 걸쳐 안정적이고도 모범적인 해석을 들려줬다. 비록 몇 번의 가사 실수, 첫 곡의 음정 불안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몰입은 높은 수준에서 유지돼 놀라움을 줬다. 실수조차 실수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일어의 장단 모음, 자음의 울림소리, 거친소리 등에 따라 소리와 톤을 미묘하게 달리하는 낭송이었다. 자음이 강조돼야 하는 대목에서는 첫음절을 미세하게 미리 조음했고, 어두운 모음과 밝은 모음의 차이도 세련되게 드러냈다. 연광철의 해석은 그가 탁월한 오페라 가수라는 점을 불식할 만큼 리트적이었고, 근본적이었다. 낭송과 성악 발성 측면에서 최적의 균형을 찾으려는 의도가 인상적이었다. 규모가 큰 오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을 과장하고 증폭해 감정을 이끌어내는 대신 내면으로 침잠하는 피아니시모로 표현의 폭을 넓혔다.
연광철이 가수로서 얼마나 넓은 표현력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준 대목이었다. 깊고 안정된 호흡, 정확한 음감 등을 바탕으로 슈베르트 본연의 선율적 아름다움 또한 훌륭하게 전달했다. 5곡 보리수, 11곡 봄의 꿈 등이 대표적이었다.
연광철은 '겨울 나그네'의 연극적 면모 또한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특히 2부의 12곡에서 보다 두드러졌다. 그는 노래하는 성격이 강한 부분과 읊조리는 성격이 강한 부분을 구분했다.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자연스러운 선율의 템포를 일관성 있게 유지했지만, 낭송 부분에서는 호흡을 조절해가며 템포에 변화를 줬고, 고요하거나 격정적인 순간을 탁월하게 대조시켰다. 13곡 '우편'에서의 유쾌한 선율 대 제 마음에 묻는 물음이 그랬고, 15곡 '까마귀'의 주선율 부분 대 마지막 대목의 물음도 그랬다. 20곡 '이정표' 또한 고백적인 선율과 편집증적인 단음 낭송의 대조가 훌륭하게 표현됐다. 18곡' 폭풍우 아침'이나 22곡 '용기' 등과 같이 강렬한 감정적 증폭이 일어나는 곡에서는 주저 없이 드라마틱한 고조 과정을 표현해냈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시종일관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줬다. 전반적으로 이번 '겨울 나그네'는 연극적이기보다는 서정적이었고, 피아니스트 또한 그에 따라 낭송과 가창을 받쳐주는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선우예권은 뒤로 물러나 '배경'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시적 정경의 묘사, 시적 화자의 심리 묘사 등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2곡의 풍향계, 17곡의 마을에서 18곡의 폭풍우 아침 24곡 거리의 악사 등에서의 묘사는 선명하고도 인상적이었다. 23곡 세 개의 태양에서는 훌륭하고도 참신한 해석을 들려줬다. 성가풍의 경건함 대신 숨어 있는 불협화음을 강조해 시적 화자의 분열적 상태를 적절하게 표현했다.
흔히 독일가곡은 감상하기 어려운 장르로 여겨져 왔다. 편성이 단출하고, 압도적이기보다는 미묘하며, 시에 대한 이해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그러한 낯섦을 넘어서게끔 할 만큼 뛰어난 몰입력과 완성도를 전해줬다. 그간 가곡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관객들은 신세계를 경험했을 듯하다. 연주자는 자신의 사명을 다했고, 관객은 독일가곡의 정수를 경험했다.
ied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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