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열망했건만, 노태우가 당선됐다

한겨레 2022. 6. 27. 10: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39) 호헌철폐 독재타도
박종철·이한열 등의 희생으로
대통령 직선제 이끌어냈지만
김영삼·김대중 야권분열로 넘겨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5, 17–20)

“그러므로 너희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오 7, 12)

양심적이고 정직한 사람을 우리는 ‘법 없이도 살 분’이라고 예찬합니다.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로우며 법을 능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하는 사람이 되고, 무엇보다도 먼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법이란 인간의 가치와 품위를 유지하고 윤리와 도덕,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최하위 기준입니다. 공동선(common good)을 지향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6년 12월 6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서 3자 회동을 갖고 내각제 개헌을 적극 저지하자는 의견을 나눈 후 오찬장으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 개정 9차례중 6차례는 독재자 위해

헌법은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와 약속으로, 대통령을 비롯한 공동체 구성원 누구나 준수해야 할 규범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공포(제정은 7월12일)한 이래로 그동안 아홉 차례나 개정되었습니다. 아홉 차례에 걸친 개정 가운데 4·19 혁명 이후의 3차, 4차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로 복귀한 현행 9차 개정을 제외한 여섯 차례의 개정이 모두 독재자의 사익을 위한 불법적 개정입니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헌헌법 제정(1948.7.17)

1차 개정(1952.7.7) 이승만 재선을 위한 직선제 개헌과 양원제 설정

2차 개정(1954.11.29) 이승만의 삼선 연임을 위한 개헌, 국민투표제

3차 개정(1960.6.15) 4.19 혁명 후 의원내각제, 기본권 보장 확대

4차 개정(1960.11.29) 반민주행위 처벌

5차 개정(1962.12.26) 5.16 군사반란 이후 박정희의 대통령 권한 강화, 헌법재판소 폐지

6차 개정(1969.10.21) 박정희의 3선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

7차 개정(1972.12.27) 유신헌법, 기본권 침해, 긴급조치 조항, 국회의원 1/3 임명(유정회), 대통령 체육관 선거

8차 개정(1980.10.27) 전두환 독재자를 위한 대통령 간접선거(7년 단임제, 대통령 체육관 간접선거)

9차 개정(1987.10.29) 대통령 직선제, 현행 헌법

제헌헌법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역사적 꾸짖음을 하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오른손을 들고 온 국민 앞에 선서한 대통령들아. 내 말을 들어라. 그리고 헌법을 제정한 국회의원들과 법대로 판결한다는 법관들, 법을 집행한다는 검찰들아. 내 말을 들어보아라! 너희는 법의 기초인 정의를 짓밟고 불의한 짓을 수없이 많이 저지른 역사의 배신자들이다.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헌법, 전두환의 7년 단임제 체육관 선거, 이 모든 짓은 법을 잘 알고 법을 바르게 집행한다는 너희들이 한 짓이 아니냐? 이 범죄에 가담한 모든 정치인, 교수, 법관, 검찰, 공직자, 법조인은 모두 가슴을 찢고 뉘우쳐야 한다. 부디 철들고 바르게 살기를 바란다. 이제는 제발 말장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선조들이 꿈꾸었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 대동 세상을 이루어다오. 항일 독립 선조들과 선인들이 만든 이 헌법을 부디 진심으로 잘 지켜 공동선을 실현해다오!”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찻값을 받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은 서울의 한 찻집. 한겨레 자료사진

군부세력의 성공한 도박, 6·29선언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헌법을 지키겠다며 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이는 헌법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단지 1인 독재와 1당 독재 체제를 위한 꼭두각시 선거 체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헌법을 짓밟고 누더기로 만들었습니다. 1인 독재 체제를 위한 들러리로 만든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헌법을 원래대로 돌리자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헌법 정신에 어긋난 헌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는 바로 1987년의 시대정신이었습니다.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전두환은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후계자인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태생부터 불의한 쿠데타 정권이 호헌을 선언하다니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영삼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이 되면서 본격적인 개헌 서명운동이 시작됩니다. 그 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이한열 열사의 죽음까지 당시를 관통했던 구호는 한결같이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입니다.

1987년 5월 27일, 야당과 재야 세력이 연대해 설립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그 이름부터 개헌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끈질기고도 치열하게 타올랐던 6월 항쟁의 불길은 결국 전두환과 쿠데타 세력이 높이 쌓아 올린 독재의 탑을 무너뜨렸습니다. 민주정의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 특별선언을 한 것입니다. 특별선언에는 대통령 직선제 외에도 김대중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6.29 선언은 군부세력의 항복선언이자 도박이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들의 도박은 결국 성공합니다.

야당과 민주 세력이 한마음 한뜻으로 개헌을 열망했지만, 정작 노태우 쪽에서 개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일대 혼란에 빠집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수많은 민주시민과 청년 학생들을 탄압했던 장본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 한마디 없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양 내뱉은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29 선언 후 열흘간 ‘6.29 선언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쟁이 벌어집니다. 6.29 선언이 전두환이 아닌 여당의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 불길했습니다. “대통령 직접 선거를 수용하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장하겠다”라는 말은 앞으로 승냥이가 풀만 먹겠다는 다짐처럼 공허했습니다.

사그러든 6월항쟁 불길

논쟁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7월 초에는 한남동에 있는 수도원에 모여 갑론을박을 이어갔습니다. 기나긴 토론 끝에 결국 수용 쪽으로 결론이 납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받지 않을 방도도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절박했지만, 절박한 만큼 성숙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그들에게 철저한 반성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허점을 노렸습니다. 6월 항쟁의 불길은 6.29라는 맞불로 인해 사그라들었습니다.

6.29 선언을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때 전두환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냈어야 합니다. 저는 당시 한국방송(KBS)과의 인터뷰에서 “6.29 선언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 없다. 진정성이 있다면 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않느냐? 뒤에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 강력히 의심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인터뷰는 방송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 바람을 타고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벌어집니다. 이른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입니다. 부산 지역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1980년대 후반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성장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경제성장의 과실은 기업주의 몫이고 노동자들은 저임금에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는 8시간 노동, 노동 3권 보장, 노동 악법 개정, 노조 결성 보장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입니다. 이에 기업들은 휴업과 폐업으로 대응했고,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은 노동자를 철저히 고립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싹을 자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1987년의 노동자 투쟁이 민주화 운동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임금 투쟁’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뼈아픈 실수입니다.

16년만에 실시된 국민 직선 대통령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와 치열한 다툼을 벌였으나 노후보가 2백만 표차로 승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광화문 촛불로 이어진 6월항쟁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 붙여진 헌법 개정안이 확정돼 10월29일 공포됩니다. 12월 16일에는 그토록 바라던 대통령 직접 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16년 만에 직선제가 부활한 것입니다. 국민적 열망과 기대는 89.2%란 투표율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이없게도 36.6%를 득표한 노태우의 당선이었습니다. ‘이런 꼴을 보려고 그렇게 많은 젊은이가 목숨 바쳐 싸우고 6월의 거리에서 목 터지게 구호를 외쳤던가’ 하는 비통함과 절망감이 몰려왔습니다.

선거 다음 날인 12월 17일 아침, 전국은 죽음의 도시였습니다. 지하철과 거리, 회사와 학교는 온통 침묵뿐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미사를 봉헌하면서도 무척이나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저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선거 패배의 직접적 원인은 두 정치인입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단일화에 실패했을 때 불행은 이미 예견됐습니다. 물론 그 밖에도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져 있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이 민족에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변하진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감옥에 가고 고문을 이겨내야 했던,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했던 수많은 청년 학생들 앞에 김영삼과 김대중은 죄인입니다. 더욱이 놀랍게도 그들은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자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부추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차례대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6월 항쟁은 미완의 혁명으로 끝났지만, 전두환 신군부 독재에 항거했던 청년 학생 시민들의 용기와 열정은 그 자체로 완성형입니다. 1987년, 시민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제5공화국을 끝냈고 민주주의에 한발 다가가는 소중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온전히 우리의 의식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2016~17년의 광화문 촛불 혁명이 바로 그 정점입니다.

어느새 우리의 열정은 정점을 지나 하향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역사는 반복됩니다. 1987년 군부독재 바이러스가 변형을 거듭하여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다시 독재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지 모릅니다. 따라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정신으로 우리 시대의 불의한 정치인, 공직자, 법조인 등을 꼭 붙잡아 제헌헌법의 초심 앞에, 역사와 겨레 앞에 무릎 꿇도록 해야 합니다.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해 양심에 따라 법과 질서를 지키고 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셨던 2000여 년 전, 율법학자들은 교묘하게 법을 불의와 증오의 도구로 악용했습니다. 더구나 율법학자들과 거짓 무리들은 법의 원천인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살해했으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통령과 권력자, 정치인, 법조인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오히려 법을 악용해 죄 없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느님,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로 불의한 자들을 내리쳐 주시고 회개시켜 주십시오. 정의를 세워주십시오. 백성들을 돌보아 주시고 지켜주소서.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