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동성혼 금지도 검토".. 트럼프가 만든 보수 대법원의 역주행

김표향 입력 2022. 6. 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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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임명 대법관 3인, 임신중지권 무효화 기여
보수 법관 "피임권·동성애·동성혼도 재고" 주장
보혁 갈등에 미국 분열.. "11월 선거, 역풍 가능성"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 보장 판례를 뒤집은 다음날인 25일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주의회 앞에서 임신중지권 옹호론자들이 "대법원은 수치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디애나폴리스=AP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24일(현지시간) 여성의 임신중지(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50년 만에 무효화한 판결을 놓고 미국 보수세력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임신중지권 제한은 시작일 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장과 성소수자 인권 보호, 투표권 확대, 기후변화 대응 등 다른 진보적 의제들에 대해서도 ‘뒤집기’를 시도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역주행에 가속 페달을 밟으려는 보수와 이를 저지하려는 진보의 첨예한 이념 대결로 미국 사회는 둘로 쪼개졌다.


“보수 우위 대법원, 트럼프의 유산 유지시켰다”

‘로 대 웨이드’ 판례 파기는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대법원이 ‘보수 성향 대법관 6명 대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으로 보수의 절대 우위 구도이기 때문이다. 보수 대법관 6명 중 3명(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임명됐다. 특히 배럿 대법관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기를 넉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임명한 ‘알박기’ 인사로 이번 판결에 ‘결정적 한수’ 역할을 했다. 1등 공신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이유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신이 내린 결정”이라면서 “내가 약속을 이행한 덕분”이라고 자화자찬도 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도 “대통령 한 사람이 지명한 대법관들이 정의를 뒤엎고 여성의 기본권을 없애는 데 앞장섰다”며 전임자를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전미총기협회(NRA) 연례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휴스턴=AP 연합뉴스

대법원은 “헌법은 낙태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조항도 그러한 권리를 명시적으로 보호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논리를 내세웠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노먼 아이젠 선임연구원은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다수 의견은 미국인의 삶과 헌법을 갈기갈기 찢었다”며 “이제부터는 ‘트럼프 법원’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일갈했다. NBC뉴스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제 공식적인 권력을 갖고 있지 않지만 대법원은 그의 유산이 계속 유지되도록 보장했다”고 촌평했다.


사법기관·주정부 권한 강화에… “성소수자 권리도 위태”

더 큰 문제는 미국 대법관은 본인 사망, 사직, 탄핵 사유가 아니면 평생 신분을 보장받는 종신임기제여서 현재의 대법원 체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법권 횡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곳은 의회뿐인데 상원을 민주당과 공화당이 50석씩 반분하고 있어 입법 견제가 불가능하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50년 가까이 입법적 뒷받침 없이 판례 형태로만 유지된 것도 의회 내 합의 도출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입법기관이 마비되면 중대한 의제들은 결국 법원이나 주정부로 넘어가게 된다. 카틱 라마크리시난 캘리포니아대 공공정책 교수는 “우리는 기본권이 주정부의 권한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있다”며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수십년 간 투자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미국 임신중지 금지법 시행 현황. 그래픽=강준구 기자

보수세력은 벌써부터 다음 목표물을 응시하고 있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은 보충의견서에서 “향후 부부 피임권, 동성애, 동성혼을 인정한 기존 판례도 재검토해야 한다”며 “그 판례에 확립된 ‘오류’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고 썼다.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공포에 떨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글래드의 세라 케이트 엘리스 대표는 “토머스 대법관의 반대 의견은 성소수자들과 모든 미국인들에게 적색 경보를 울리고 있다”며 “우리는 병실에서 쫓겨나고, 사망진단서를 받지 못하고, 배우자 복지혜택을 거부당한 암울했던 과거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공화는 대립… “미국인 다수는 임신중지권 지지”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치 공방도 격화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 미치 매코넬 공화당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공화당, 대법원의 과반수 때문에 오늘날 미국 여성은 어머니보다 자유가 적다”고 규탄했다. 그러나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태어나지 않은 모든 아이는 소중하고 특별하며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환영했다.

24일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임신중지권 지지 시위 참가자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50년 만에 뒤집은 대법원의 판결에 항의하며 '2등 시민'이라고 적힌테이프로 입을 막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로 공화당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민주당 지지자, 여성, 유색인종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투표장에 나가면 민주당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회사 갤럽 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지권을 옹호하는 비율이 지난 10년 동안 45%에서 50% 사이를 유지하다가 55%로 급등해 1995년 이후 가장 높았다. 반면 생명권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임신중지권 박탈에 찬성하는 의견은 39%로 1996년 이후 가장 낮았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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