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애그플레이션

강경희 논설위원 2022. 6. 27. 03: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인도양의 섬나라 스리랑카가 공무원 주 4일 근무제를 발표했다. 달러가 바닥나 외채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나라에서 공무원 100만명한테 금요일마다 유급 휴가를 주겠다고 한다. 스리랑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주력 관광 산업이 붕괴했다. 달러 고갈로 식량도, 석유도 못 들여왔다. 식료품값이 1년 전보다 57% 넘게 올랐다. 기름 없으니 출근하지 말고 집 뒷마당에 농사 지어 자급자족하라고 긴급 도입된 황당한 주 4일제다.

▶국제 곡물가가 급등하던 2008년 초 이집트 총리가 “정부 보조금을 받은 밀가루를 암시장에 팔면 징역 15년형에 처하겠다”고 성명을 냈다. 이집트 정부는 밀가루에 보조금을 지급해 국영 빵집에서 빵 하나 10원꼴로 무상에 가깝게 공급해왔다. 튀니지 정치학자 사디키는 이런 시혜 정책을 ‘빵 민주주의’라고 표현했다. 국제 곡물가 상승으로 시중 빵값이 치솟으니 사람들이 국영 빵집에 장사진을 쳤다. 빵사기 전쟁 통에 시비가 붙어 목숨을 잃는 ‘빵 순교자’까지 생겼다. 재정도 감당이 안 됐다. 급등한 곡물가가 이집트 ‘빵 민주주의’에 타격을 가해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고 궁극에는 30년 독재의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나는 단초를 제공했다.

▶기원전 75년 무렵 로마의 속주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했다. 지중해 일대에 해적이 준동해 식량 운송에도 차질이 생겼다. 로마는 식량을 수입에 의존했다. 빵값이 치솟자 폭동이 일어나 두 명의 집정관이 쫓겨났다(윤덕노,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 역사적으로 생존과 직결되는 식료품 가격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오르면 나라가 흔들렸다.

▶2007~2008년 당시 월가의 투자 보고서에 ‘애그플레이션’이 등장했다. 다른 물가에 비해 유독 농산물 가격이 급등한 현상을 가리켜 농업(agriculture)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조합해 그리 불렀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애그플레이션을 사회 안정을 뒤흔드는 ‘침묵의 쓰나미’라고 했다. 유엔기구들이 잇달아 식량 위기를 우려한다. 2007~2008년의 곡물가 파동이나 2011년 아랍의 봄보다 지금 상황이 더 나쁘다는 것이다.

▶경제부총리가 6월 또는 7~8월에 물가 상승률이 6%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1998년 이후 20여 년 만에 처음 겪는 높은 물가 상승률이다.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 곡물가가 급등해 정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타격받는 저소득층을 각별히 챙기고,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해 이 파고를 넘어야 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