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단 말 달고 산 엄마… 자폐청년의 골프 기적, 그렇게 시작됐다

천안/민학수 기자 2022. 6. 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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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아들 이승민씨 프로골퍼 키운 박지애씨에 ‘장한 어머니상’
“더 잘해서 디오픈 갈래요” - 발달 장애 3급 프로골퍼 이승민(왼쪽)과 그의 어머니 박지애씨. 박씨는 26일 천안 우정힐스 골프장에서 열린 코오롱 한국오픈에서 조선일보와 대회 조직위가 마련한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사진작가 손석규

프로골퍼 이승민(25·하나금융그룹)은 두 살 무렵 선천적 자폐성 발달 장애 진단을 받았다.

특이하게 어려서부터 파란 잔디에 하얀 공이 날아다니는 골프를 좋아했다. 잔디를 한 움큼 쥐고 냄새 맡는 버릇이 있어 늘 코에 흙이 묻었다. 냄새만 맡아도 잔디 종류를 알아맞혔다.

그가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10년간 미국 등에서 생활하다 귀국하니 장애인의 현실은 숨 막혔다. 아버지를 따라 골프장에 간 날 이승민은 “나 이거 하고 싶어”라고 했고, 그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 박지애(56)씨는 아들의 골프 뒷바라지를 결심했다. 이승민은 5~6세 유치원생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낯선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걸 두려워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과 ‘레인맨’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전형적인 자폐증 증상이 있었다.

좋아하는 골프를 하면서 아들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표정도 좋아졌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중·고교 때 대회를 나가면 “진행 속도가 느린데 다른 애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언제까지 골프를 시킬 거냐”는 뒷말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다. 박씨는 “골프가 아니면 승민이는 골방 바깥으로 나올 방법이 없었다. 제가 살아서 숨 쉬는 동안 온몸으로 막아서 승민이가 바깥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임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26일 막을 내린 코오롱한국오픈에서 발달장애 3급으로 KPGA에서 활약하는 이승민을 키운 어머니 박지애씨에게 조선일보 '장한 어머니상'이 수여됐다. /사진작가 손석규

골프는 기적을 선물했다. 고교 2학년이던 2014년 이승민은 세미 프로골퍼 자격증을 땄고 3년 뒤에는 한국프로골프(KPGA) 사상 처음으로 발달장애를 가진 선수가 1부 투어 프로 선발전을 통과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이승민은 올해 SK텔레콤 오픈을 포함해 국내외 1부 투어에서 3차례 컷을 통과했다. 골프 대회에서 컷을 통과한다는 건 대회에 나온 정상급 선수 약 150명 가운데 60~70등 안에 든다는 이야기이다. 발달 장애 선수에겐 우승 못지않은 성과다.

어머니 박씨는 아들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함께 있었다. 아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아들보다 늦게 잠든다. 아들이 대회에 나갈 때마다 클럽하우스에서 5~6시간씩 대기한다.

“우리가 생각지 않게 불편하게 했을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란 말을 먼저 한다”고 했다. 끝이 없는 터널 속을 걷는 것 같지 않을까? 박씨는 “25년 전 승민이가 우리 부부에게 찾아오고 나서 막막할 때도 잦았지만 그럴 때마다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다’고 위로하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주치의인 분당서울대병원 유희정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이승민군은 골프를 하면서 발달 장애 2급에서 좀 더 완화된 3급이 됐고 언어 구사 능력도 몰라보게 좋아졌다”고 했다.

6일 코오롱 한국오픈시상식서 조선일보 '장한 어머니상' 받은 이승민프로의 어머니 박지애씨. /사진작가 손석규

26일 코오롱 한국오픈이 막을 내린 천안 우정힐스 골프장에서 이승민군 어머니 박지애씨는 조선일보와 대회조직위원회가 마련한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초청 선수로 코오롱 한국오픈에 참가한 이승민은 한국오픈에서 2라운드 합계 10오버파,144명 중 공동 109위로 컷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코스에서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이승민은 “좋은 경험을 했고 다음엔 더 잘해 우승자에게 주는 디오픈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의 꿈은 마스터스에 참가하는 골퍼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 박씨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기회를 줄 때 얼마나 좋은 변화를 얻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승민이가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승민과 어머니 박씨는 다음 달 18일부터 사흘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에서 열리는 1회 장애인 US오픈 골프 대회에 나선다. 다양한 장애를 지닌 이들에게 골프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기회를 넓혀주겠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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