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AI시대의 전략] 반도체 미래, ‘팹리스 인재’에 달려… 문과생도 전문가로 클 수 있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 2022. 6. 2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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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시대엔 지식 찍는 인쇄소가 ‘파운드리’, 출판사가 ‘팹리스’
취약한 한국의 팹리스 성장하려면 반도체 설계 인재 확보가 시급
목마른 103개 기업, 직접 인재 양성 나서…전공보다 창의력 중요

인쇄(印刷)는 잉크를 사용해 글이나 그림을 종이에 찍어내는 과정이다. 인쇄를 통해 인류의 문화가 책이라는 형태로 완성됐다. 구텐베르크는 1455년에 ‘구텐베르크 성서’로 불리는 최초의 라틴어 성서를 인쇄했다. 구텐베르크 인쇄기 덕분에 책이 일반 시민에게 대중화될 수 있었고, 활자화된 지식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다.

디지털 혁명 시대를 맞이한 지금, 인류의 문화와 지식은 실리콘 기판 위에 인쇄된다. 실리콘 반도체 위탁 생산을 도맡는 전문 기업을 ‘파운드리(foundry)’라고 부른다.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은 ‘팹리스(fabless)’라고 한다. 팹리스가 설계한 대로 파운드리는 반도체를 생산한다. 책의 기획, 콘텐츠 생산, 작가 발굴, 마케팅 작업을 하는 출판사가 인쇄소에 책 인쇄를 위탁하는 생산 방식과 비슷하다. 팹리스를 디지털 혁명 시대의 출판사, 파운드리는 인쇄소로 보는 이유다.

특히 팹리스는 실리콘 반도체 분야에서 제품을 기획하고, 콘텐츠를 창출하고, 설계를 창조하면서, 편집을 진행하고, 위탁 생산을 주문한다. 디지털 혁명 시대 지식의 키를 쥔 출판사인 셈이다.

◆팹리스는 디지털 혁명 시대의 지식 출판사

반도체는 정보 저장이 가능한 ‘메모리 반도체’와 연산·제어 등 입력된 데이터를 처리하는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로 구분되는데, 시스템 반도체가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두뇌에 쓰이는 핵심 반도체다. 메모리 반도체에 강한 한국이 시스템 반도체에서 열세인 것도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픽=백형선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1.0%(2021년 기준)에 불과해 미국(68%), 대만(21%), 중국(9%)보다 크게 뒤처져 있다. 위탁 생산(파운드리) 점유율은 14%로 세계 2위인데, 반도체 설계 시장 점유율은 1%에 불과한 것이다. 책을 기획하거나 집필하진 못하고, 인쇄만 대신 해주는 인쇄소에 머무는 양상이다. 결국 지속 가능한 반도체 경쟁력을 위해선 세계적인 팹리스 기업이 국내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팹리스 기업이 설계하는 시스템 반도체의 내부로 들어가보면 데이터 계산을 위한 블록(Processing Unit), 데이터 저장을 위한 캐시 메모리 저장 공간, 내부 회로 간 연결을 위한 데이터 버스(Bus), 외부와의 무선 통신을 위한 모뎀 회로, 외부 고속 데이터 송수신을 위한 네트워크 회로, 디스플레이 구동 회로, 센서 입력을 위한 디지털 컨버터(ADC), 안정된 스위칭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전력 공급망 등으로 구성된다. 시스템 반도체가 수행하는 기능과 알고리즘에 따라 각 블록과 회로의 크기와 배치, 그리고 연결망이 달라진다. 이들은 설계 자산이라고 불리는 IP(Intellectual Property) 형태로 존재한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컴퓨터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인공지능 반도체도 이렇게 설계된다. 결국 팹리스 기업의 경쟁력은 바로 IP 경쟁력에서 나온다. 독창성이 있어야 하고 성능과 전력 소모, 비용 등에서 강점이 있어야 한다. 이에 더해 시스템 반도체를 구동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도 함께 제공하여야 한다. 팹리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이 우수한 IP를 창출할 수 있는 탁월한 전문 인재의 확보에 달린 이유다.

◆목마른 기업이 우물을 판다

반도체 팹리스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는 과연 어떤 자격과 소양을 가져야 하는가? 제일 먼저 반도체와 관련한 기초과학 실력이 매우 튼튼해야 한다. 수학, 물리, 화학, 재료과학이 반도체 전문가의 영원한 기초가 된다. 전공에서는 디지털 설계, 회로 설계와 소자 설계, 그리고 소프트웨어 구현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시스템 반도체 설계와 이를 구동하기 위한 응용 소프트웨어의 동시 설계가 가능하게 된다. 이들은 기초부터 응용까지 관통하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통합을 이루는 인재들이다. 심화 학습으로 인공지능과 데이터 과학도 공부하면 더 좋다. 이를 바탕으로 창의력, 융합능력, 응용력이 결합되고 소통과 협업 능력이 더해지면 세계 최고의 반도체 인재가 된다.

◆“문과생도 반도체 설계 인재로 키운다”

국내에서 ‘한국팹리스연합회’ 소속의 103개 기업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성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협회는 최근 반도체 설계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직접 발 벗고 나섰다. 가천대와 공동으로 ‘반도체 설계(팹리스) 전문 인력 양성 아카데미’를 설립해 약 1년 동안 반도체 설계를 직접 가르치고, 실습과 채용까지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통해 우수한 문과 졸업생도 반도체 전문가로 전환시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논리력과 창의력, 그리고 성실성만 있으면 반도체 설계 전문 인력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 이론은 은퇴한 반도체 분야 명예교수들이 강의하고, 설계 실습은 팹리스 기업 전문가들이 직접 나서 교육한다.

이처럼 팹리스 기업들이 직접 시스템 반도체 인력 양성에 나서고 있다. 정부 규제 완화, 예산 지원 확대, 반도체 학과 정원 증원 등을 마냥 기다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기초가 튼튼한 반도체 인재를 배출하기까지 학부 졸업생은 최소 4년 이상, 박사 인력은 10년 이상을 투자하고 기다려야 한다. 이들이 입사 후에도 계속 현장 교육을 받고 공부하고 탐구해야 한다. 또 연구·개발에 필요한 설계 소프트웨어와 장비에 대해서도 배워야 한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제품 개발 이슈도 파악해야 한다. 입사 후 추가 현장 교육을 받으면서도 최소 3년은 지나야 비로소 자기 몫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욱 시급해진 반도체 인재 육성 책임이 대학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인재에 목마른 기업들이 이미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정부도 전국 국립대에 반도체 학과를 신설하고 반도체 대학원을 설립하는 등 실질적 지원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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